08/15/2021 - 애통이 복이 되게 합시다 [마태복음 5:1-4]
한 칼럼니스트가 인생을 ‘희로애락의 비빔밥’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살다보면,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일들을 섞여서 경험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3:4절에,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희로애락의 비빔밥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여러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환경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웃고 춤출 때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울 때와 슬퍼할 때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속에 슬퍼할 일들을 만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으셔서 이러한 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애통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애통하는 자라고 했을 때, 이는 슬퍼하는 자입니다.
지금 힘들고 눈물이 나는 상황속에서 너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네 일이 아니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지…’ 하며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애통하는 사람들을 향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생활하면서 여러가지 애통의 상황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애통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생각하는 복있는 사람은, 애통할 일이 없이 모든 것을 풍족히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몸도 건강하고, 물질도 풍성하게 가지고 있고,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도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애통한 일을 당할 때에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고,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주시고자 하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애통의 때를 맞이할 때에 어떻게 반응해서 그 복을 누릴 수 있을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우리가 애통하는 것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애통하는 모든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마다 애통하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1) 어떤 이들은 나의 원하는 욕망이 이루지 못할 때에 애통해 하기도 합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애통하는 아합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세벨이 남편인 이스라엘왕 아합을 보니 얼굴에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아합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꼭 가지고 싶은 포도원 밭이 있어서 그것을 살려고 하는데, 그 밭 주인인 나봇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상들에게 주신 것을 대대로 물려 받았는데, 그 땅을 팔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합왕이 가지고 있는 슬픔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하는데서 오는 애통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원하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애통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통은 복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뺏았음으로 지신의 애통함을 해결했는지 모르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벌을 받는 일로 이어집니다.
우리로 복되게 하는 애통은 나의 욕망을 이루지 못해서 애통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것을 소유한 자가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더 가지지 못해서 애통하는 것은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들의 욕망은 끊임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는 법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많이 있는데 그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면 복이 됩니다. 그런데 주신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다른 이들의 것을 탐하는 것은 복있는 자의 애통함이 아닌 것입니다.
2)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고통과 어려움속에서 애통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이들 중에 보면,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몸에 병이 있어서 고통 받는 이들, 귀신에 끌려다니는 이들, 삶의 문제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들은 애통해하며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함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치유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애통함이 없는 이들은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애통할 만한 환경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비록 환난은 고통스럽지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되고 만나게 되는 것은 복인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 중에는 교회를 처음 나온 이유가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해서 나온 분들도 계십니다. 만약 그분에게 병이 없으셨다면 건강한 몸을 가지고 죄가운데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병으로 그분으로 애통하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올 수 있는 복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애통함이 있습니다. 몸에 질병이 있다던지, 가정에 문제가 생기거나, 계획했던 것들이 제대로 안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3) 애통하는 자들 중에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애통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1). 바리새인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안에 있는 외식과 정죄의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도 마땅히 자신의 죄로 애통해야 하는데 이를 깨닫지 못했기에 결국 죄용서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애통해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바리새인과는 달리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통함이 하나님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두 사람을 보고서 누가 의롭게 인정함을 받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했던 자가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죄에 대해서 애통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키거나 무관심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이를 애통해하며 회개의 자리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복을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4) 그리고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악을 보며 애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애통해 했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애통해 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 예수님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23:26-31).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을 보면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을 보며 애통하는 이들에게, 실제로 너희 자신들을 위해서 애통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죄로 인해서 멸망당할 것에 대해서 애통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애통하심을 우리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죄악과 고통을 볼 때에 우리도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의 약자들이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애통해야 합니다. 피부색깔로 인해서 사람들이 차별받고 폭력을 당할 때에 우리는 애통해 해야 합니다. 팬데믹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고통받을 때에 이를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죄로인해서 죽어가는 이들을 볼 때에 애통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애통함은 내 개인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애통함과 닿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통하시는데 나는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복의 인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애통하시는 마음으로 우리도 애통한다고 하면 그것은 복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무엇때문에 애통하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게 되는 것은 그 애통함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올 때인 것입니다. 우리가 애통할 일을 만날 때에 그것이 꼭 저주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 애통함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애통함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복된 일인 줄로 믿습니다.
곧 우리의 복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모든 애통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이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복이 있는데, 위로를 받는 복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4절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복음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다가 사도바울과 같은 극심한 환난과 고통을 당한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지막까지 주님의 사도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위로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가 되시는 분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애통의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운전을 하다가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보면, 구걸하시는 분들이 깡통을 들거나, 도와달라는 핏켓을 들고 서 있으십니다. 뜨거운 날씨가운데 그들의 애통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그들의 애통함을 외면하고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에, 빨리 신호등이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의 애통함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6: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비록 애굽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고 더 학대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에 반응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애통할 때에 그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듣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애통할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통함을 당할 때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소리를 듣고 계심을 믿고 토로하십시오. 그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형편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통할 때에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로보다는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욥이 환난 가운데 있을 때에 그 친구들이 욥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마음에는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형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들은, 욥을 정죄하기만 하고 욥에게 더욱 큰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욥의 친구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형편을 이해하려고 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이 사는 배우자도, 가장 친한 친구도 나의 형편을 알지 못하고 위로한다고 하지만, 도리어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형편을 제대로 알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 때로 오해를 받아서 애통해 할 때에, 다른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아시는 분인 것입니다.
때로 다른 사람이 나의 슬픔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억울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진실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해 주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애통을 위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애통함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6:21절에, 예수님은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애통해하며 주님앞에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애통함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하시는 구원의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이를 믿는 시편기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애통함을 주실 때에는 그 슬픔 가운데 낙심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애통해 할 때에 그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실 분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결하기 힘든 삶의 문제로 고통당할 때에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 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들이 하나님께로 나올 때에, 그 슬픔에 얽매여 살지 않도록, 위로해 주시고, 우리가 애통해하는 문제들을 이기고 나가도록 힘주시는 능력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일로 애통해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애통함이 없어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애통함을 통해서 우리를 복있는 자로 세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애통의 때를 주시는 것은 그 애통함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애통해 할 일이 많으십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관계적인 문제가 있습니까? 나의 죄가 나를 괴롭힙니까? 나를 억누르는 고통스러운 환경이 있습니까? 이 땅의 악을 보면서 애통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이러한 애통함을 주실 때는 하나님앞으로 나아가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애통함을 외면치 않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애통의 때를 주실 때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인생임을 깨달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애통함이 하나님의 애통함과 연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파할 때에 그러한 나를 보시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애통함을 살피며, 주님의 위로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