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교회 40주년을 맞았습니다. 40년전 하나님께서는 13분을 통해서 우리교회를 세우셨고, 현재 여러분들을 통하여 이 교회를 지속하고 계십니다. 오늘 창립기념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의 시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사람들의 사교 모임이나 봉사 모임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산주의 철학자 칼 마르크스는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들은 환상과 같은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를 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알기 전, 사울로 불리어 질때, 교회에 대한 커다란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공동체로 사울은 여겼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교회를 탄압하는 일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을 냅니다. 8장에서는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는데 참여하기도 하고, 그 이후 교회를 박해하는데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사울이 180도 바뀌어서, 자신이 박해하던 교회를 지지하며, 교회에게 주시는 사명을 전심으로 감당하는 예수님의 사도로 바뀌게 됩니다. 사울이 이렇게 변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면서, 우리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잘 이루어 나가는 교회로 지속될 수 있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사람들마다 교회에 대한 생각들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의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사울을 소개하기를 ‘주의 제자들에 대해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한 이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박해를 받고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교인들이 각 지역에서 전도를 하고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사울은 그 흩어져 있는 교인들까지 쫓아가서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고자 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가서 기독교인들을 잡으려고 대제사장에게 공문까지 받았습니다.
다메섹이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240 킬로미터. 150마일이나 떨어진 먼곳입니다. 가는데만 오육일이 걸리는 먼 길이지만, 그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살기가 등등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일행을 강한 빛으로 두루셨습니다.
사도행전 26:13절에 보면, 그 때가 정오입니다. 햇빛이 가장 밝을 때에, 그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그 일행을 비친 것입니다. 세상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바울은 초자연적인 빛이 자신을 두루는 것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땅에 엎드려 그 빛을 피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져 있는 사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하신 첫마디가 이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을 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네가 박해하는 예수”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현재 박해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교회였지, 예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울이 박해하는 그 교회가 곧 예수님 자신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그의 몸의 각 지체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예수님은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박해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만약 사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시라고 제대로 알고 믿었다면 그는 교회를 핍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교회를 핍박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핍박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저주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를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교회를 핍박하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박해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일 인 것입니다.
교회가 욕을 먹고, 조롱거리가 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아파하십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받을 때에, 예수님은 함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성도는 예수님이 욕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하지 않도록 힘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잘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며, 또한 나를 잘 되게 하는 일입니다.
2.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커다란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셨고, 그 믿음을 가진 자들로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을 대표하기에는 여전히 죄가 많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룩하신데, 실제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사람들은 아직 죄와 더러움 속에 있기에, 예수님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괴리감이 교회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면으로 볼 때, 교회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목숨을 걸고 세우신 교회를, 사울이 얼마나 훼방하고 망하게 하려고 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울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사울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교회를 사울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 사울을 제거하시면 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 죽게 하시거나, 갑자기 병을 주셔서 사울로 인해서 교회가 더 이상의 핍박을 받지는 않도록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직접 찾아오셔서, 그로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도록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누구보다 은혜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자기는 괴수 중에 괴수였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셔서 사도 삼으셨다고 감격해 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다.”라고 감격해 하며 고백합니다.
우리도 사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몸이 된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의롭거나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까?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세우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기 위해서, 그 당시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거나 유능한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들을 찾아가셨고, 그 당시에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리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당신의 몸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고르기 위해 어떤 이들을 찾아가시겠습니까? 아마 사회적으로 특출난 사람을 뽑아서 자신을 대표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사람을 자신의 몸된 교회를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 죄인이 모두 의인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죄인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완전함을 요구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무지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거하면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변화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의 비판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완전한 죄인들이 모였기에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체들 간에도 서로의 부족함을 볼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지체의 부족함을 볼 때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부족함을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그의 몸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내하시며 돕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볼 때에, 이를 품고 그들의 연약함을 도우며, 부족함을 채우는 지체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있는 곳이고, 또 그 은혜를 가지고 성도들이 서로를 섬기는 곳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증거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잡혔을 때에 그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간증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2:10절에 사울이 초자연적인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바울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소원을 빕니다. ‘병든 내 아들을 고쳐주세요. 귀신들린 내 딸을 고쳐 주세요. 눈을 보게 해 주세요.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갈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비록 눈이 멀었지만, 눈을 보게 해 달라고 구하기 보다, 먼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지에 관심합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그리고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그가 할 것을 알려 주시는데,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앞에서 네가 보고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셔서 그를 부르셔서 교회의 지체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만의 할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이루는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모든 지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늘 주님께 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를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학교와 일터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어떻게 행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주님께 물으며 기도하며,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제 또 한살을 먹게 되는데, 더욱 더 주님께 묻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잘 드러내는 주님의 몸으로 더욱 더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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