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uNy9Ycep06s
오늘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여러분들은 뭔가를 알기 위해서 힘써 보신 적이 있으십까?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때에 사실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가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더욱 알아가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배우고, 유치원에서도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것들을 배웁니다. 학생이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더 많은 것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가서 또 일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이거나 기술적인 것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적인 면도 알아가게 됩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교제를 하면서 상대방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아갑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한다.’ 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환난과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강대국인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그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그들로 인해서 거의 망할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찢고 치셨다고 했습니다.여기서 찢으셨다고 했는데 이는 사자가 사냥한 먹잇감을 찢는듯한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앗수르가 찢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찢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찢고 치기만 하신 분만이 아닙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의 또 다른 면이 나옵니다.
“그가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찢기도 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고자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생존에 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이제 하나님을 힘써 앎으로 그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일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볼 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몰라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알아가는 것에 대해서 소홀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도 이 땅에서 사는데는 지장이 없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며, 하나님을 더욱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1.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에 소홀했던 것은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속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속에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많은 백성들 중에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복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선하거나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잘알서도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었기 때문에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신명기 7:7).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없이는 제대로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죄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호세아는 그들에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이는 육신적으로 멀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의 우상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힘써 아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세상의 이방 사람들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망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서는 죄된 삶을 살아가다가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호세아는 죄악가운데 망할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로 돌아갈 때에 살 길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간다.’ 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지은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죄인들을 낫게 하시고, 싸매여 주셔서 살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손해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며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살지 않는 우리를 심판하셔서 죽이신다고 하더라도 전혀 손해 볼 것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간과하지 않고 그것을 벌하시는 것도 그들을 살리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환난속에서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을 살 때에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떨어져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것이 없지만,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떠난다면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속성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어서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며 그분을 알아가는 것은, 영원한 생존에 관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늘 인식하며, 늘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더욱 그분을 알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2.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뜻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신데, 그것은 ‘인애’입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이 고민하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없어지는 이슬같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애를 기대하셨습니다. 인애는 ‘헤세드’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은혜, 사랑, 친절” 이라는 통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없어지는 이슬같다고 했습니다. 아침 구름이라고 하면 아침 안개를 가리킵니다. 아침 안개나 이슬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잠깐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인애의 모습은 아침안개나 이슬과 같이 쉬사라져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인애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애로 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가운데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가지시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구원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인애가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에 대해서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6절에 하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고 인애를 원하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와 번제를 드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인애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관심과 사랑입니다.
한 아이가 장난감 공룡을 들고 있길래 “이게 뭐야?” 라고 물었는데, 그 아이는 신이 나서 공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공룡들이 그려진 책까지 보여주면서 공룡에 대해서 설명해 주며 신나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 누구보다 공룡에 대해서 진심이었고,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아이가 공룡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데, 그 공룡들의 이름과 그 특징을 외우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공룡에 대해서 관심과 사랑이 있으니까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알아갔던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내가 좋아하고 관심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키지 않아도 더욱 알아가고자 노력을 합니다. 상대방의 성격은 어떤지,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습관은 무엇인지를 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실 때에, 그 전제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을 힘써 알자” 고 할 때에는 단순히 지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써 사랑하자”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인애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알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인애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보았을 때에 그들의 인애는 안개와 같이 사라져 찾을 수가 없었고, 무자비와 악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그들의 삶가운데서는 인애가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룻이라고 하는 여인이 인애를 베풀어서 칭찬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아스가 룻을 향하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룻 3:10)
룻은 그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인애를 베푼 며느리입니다. 나오미는 참으로 비참한 인생을 산 여인입니다. 나오미의 가족이, 고향인 베들레헴에 든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객지에서 그 참담한 상황을 맞았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그녀에게 인애를 보이며 끝까지 함께 했던 사람이 모압여인으로 며느리로 삼은 룻이었습니다. 룻은 자신의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가 홀로 되었음에도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베들렘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에 홀로된 시어머니와 함께 낯선 땅으로 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서 타작하는 곳에 가서 밭에 떨어진 곡식을 주어서 그 시어머니를 봉양합니다.
룻은 비록 이방여인이지만, 그 여인에게는 인애가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그녀의 인애의 모습을 칭찬을 합니다. 후에 룻은 보아스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룻의 인애의 모습을 사람만 아니라 하나님도 보고 계셨습니다. 룻과 보아스는 결혼한 후에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고,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룻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애를 가진 여인이고, 다윗왕의 조상이요, 나아가 예수님의 육신적인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라”라고 했을 때에 ‘알라’는 단어의 어원은 ‘야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을 기초로 해서 행할 때에 이것을 ‘야다’라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하면서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인애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인애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인애하기 힘든 상대를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인애하시며 은총을 베풀어주셨는지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인애를 보답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이 세상에 알리는 일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잘 아십니까? 언제 힘써 알고자 하셨습니까? 혹시나 잘 모르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알리고자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인애와 구원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알리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알고자 진심으로 힘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힘써 아는 것은 하나님을 힘써 사랑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인애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사랑이 식어진 이 때에 하나님의 인애를 증거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 가운데 죽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증거함으로,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하나님의 백성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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