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ujx8iLWv-cM
제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말을 지혜롭고 윗트있게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심각하고 불편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편하게 듣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도 아이들을 양육할 때나 교회에서 교인들과 대화할 때에 지혜롭게 한다고 하는데도, 대화를 마친 후에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어떨때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게 좋았을 뻔 했다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후회가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바울의 마음이 아주 불편했고, 그래서 후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참 신경쓰이는 교회 중에 하나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50년경에 제2차 선교여행을 실라와 함께 갔다가 세운 교회입니다. 고린도는 아가야지방의 수도이고, 무역의 요충지 입니다. 그러니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었고 여러 문화가 섞여 있었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유대교인들은 바울과 그 일행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그곳에서 일년반동안 사역하며 고린도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나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을 때에 고린도교회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좋지 못한 소식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내용과 같이, 교회안에 파당이 생겨서 교회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많은데 자신이 받은 은사를 우월하게 여기며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바울이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교회안에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원하는 바램에서 입니다.
첫 편지를 보낸 이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는데, 고린도교인들의 태도가 좋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를 제대로 영접하지도 않았고 바울의 권면도 받지 않았습니다. 방문 이후에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겠습니까? 바울은 그들에게 또 다른 편지를 씁니다. 이를 ‘눈물의 편지’라고 일컫는데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며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디도를 통해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보내놓고서 바울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편지를 보내고 후회했다고 했습니다. 이 편지로 인해서 고린도교인들이 근심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문제가 더욱 악화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편지를 전하고 오는 디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디도의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걱정과는 다르게 디도는 아주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그 편지를 받고서 그들이 디도를 위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사모하며 열심을 내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애통해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디도로부터 듣고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고린도교인들을 근심케 했지만, 그 근심은 잠간이었고, 그 근심으로 그들이 바른 자리로 돌아옴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일로 근심 중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근심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뤼페오’를 쓰는데 ‘슬프게 만들다. 고통스럽게 하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프고 슬프게 하는 것이 근심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필요한 근심이 있고, 반대로 해가 되는 버려야 할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근심이 없으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엇이고, 어떠한 유익이 있는지를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입니다.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냈을 때에, 교인들은 그의 편지를 읽고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기 전에는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안에 파당이 지어지고, 자신이 받은 은사가 다른 이들이 받은 은사보다 우월하다며 서로 다투고, 그리고 거짓 교사들에게 유혹되어서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며, 바울이 전한 예수의 복음이 잘못되었다고 비방하면서도, 그들은 그 일이 근심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편지로 그들의 잘못을 고발 할 때에 비로소 그들은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일의 잘못을 알게 되고, 그것에 대해서 아파하고 슬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에게 그 근심이 유익이 되었던 것은 그 근심으로 인해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근심과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변화가 되었습니다. 11절에 보니까, 그들은 교회의 바로됨을 위한 간절함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변호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분하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또한 그 말씀에 열심을 냈습니다. 또한 잘못한 이들에 대해서 벌하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고린도교인들에게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근심은 회개로 이끌었고, 그 회개로 인해서 그들이 깨끗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의 근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와 정결함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근심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근심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말씀으로 잘 반응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근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바라보고 살피는 것입니다.
지난 팬데믹 기간을 지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흐트러지거나 식어진 부분을 살피며 근심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근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걱정이 되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지를 살피며 근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맡겨주신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깨닫고 근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에 그것이 근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잘못됨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 회개할 때에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2. 그런데 사람이 잘못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근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해야 될 때에 평안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지함에서 오는 거짓된 평화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에 애를 썼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받은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고자 힘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생일대에 큰 잘못을 연이어 저지릅니다. 자신의 충신인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성적으로 범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죄를 숨기기 위해서 음모를 꾸며 우리아 장군을 전쟁터에서 죽였습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는 심히 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십계명에 있는 간음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같으면 그러한 죄를 지었으면 근심해야 하는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그의 죄로 인한 근심과 애통해 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근심하지 않으니까 누가 근심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근심하십니다. 다윗이 죄를 근심하며 회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근심하게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지 않는 다윗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나단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근심합니다. 그리고 회개함으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을 향한 근심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 근심의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하는 근심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근심을 주시고 회개의 길로 인도하셨으니 말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이렇게 선택하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둘째 아들이 어렸을 때에 엄마의 지갑에서 상당한 돈을 훔쳤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 때가 아들에게 매가 필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해서 20대 정도를 때렸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아들이 무척 서럽게 울면서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목사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묻자, 아들은 말하기를 “아빤 날 슬프게 만들었잖아” 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 때 목사님은 그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들아, 너만 슬픈게 아냐, 아빠는 더 슬퍼. 아빠 말 잘 들어봐. 네가 잘할 때는 아빠는 기뻐하면서 사랑해, 그리고 네가 잘못할 때는 아빠는 슬퍼하면서 너를 사랑한단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할 때에 나보다도 더 먼저 하나님이 슬퍼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 8:26절에 보면, 성령님이 탄식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께서 왜 탄식을 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연약하여 죄를 짓던 고생을 하던 무슨 상관이 있다고 성령님이 탄식하십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허튼 길로 갈 때에 그 부모가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그 자녀가 자신의 잘못을 근심하며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도가 연약함으로 죄가운데 있을 때에 탄식하십니다. 그리고 성도가 근심 중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갈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근심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충성스럽고 선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죄성을 살피며 근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라고 근심합니다.
바울은 스스로의 악함과 연약함을 잘 알았기에 자기 자신을 볼 때에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낙심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는 은혜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2:9절에 말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근심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적 연약함과 무지함가운데 죄를 짓고 실수할 일이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내가 완전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완전치 못한 우리를 도우시고 강건케 하시는 주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나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는 근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가운데 있을 때에 기뻐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근심을 받아주시고,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근심은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지만, 세상근심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부터 돌려,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러한 근심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말씀의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 씨는 얼마 자라다가 가시떨기에 기운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리와 재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들은 근심으로부터 해결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적으로 풍요해지고 높아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세상근심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근심이 아니라, 하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근심하면 할 수도록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가까와지는 근심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들이 요즘하고 있는 근심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아야지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근심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적으로 내가 원하는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근심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근심된 일들이 많이 있지만, 모든 근심이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근심할 때에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죄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고, 회개할 때에 죄인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근심에 빠져 사망의 길을 걷는 이 때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통해 회개하고 정결케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근심케 해드리는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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