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o29GJYYA7k
여러분은 교회에 다니시면서 어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예배드리는 일, 기도하는 일, 식사를 준비하는 일, 청소하는 일… 이 모든 일들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바쁘거나 사정이 안되면 덜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들은 건너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참으로 바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아니면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이 그 고통으로부터 치유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대부분 사람들에 둘러 싸여, 참으로 분주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예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신 일이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떨어져서, 그리고 제자들과도 떨어져서 한적한 곳을 찾아 혼자 머무르시곤 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기도는 다른 것과 대치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 어느 관계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기도해야 해야 한다는 의무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만나셨습니다. 사람들과 대화하시기 전에 하나님과 먼저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만남은, 모든 사람들의 관계나 만남보다 우선하는 일이었고, 기초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떠한 의미입니까? 내가 뭔가 필요하고 아쉬울 때에 하나님께 하는 간구의 일입니까? 아니면 내가 믿는 하나님과 가지는 인격적인 만남과 대화의 시간입니까?
오늘 말씀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제자 중 한 명이 예수님께 나아와 부탁을 드립니다.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한 제자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것은 그 제자가 기도하는 법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사야 56:7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1:13절에 보면, 예수님꼐서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유대시각으로 시각으로 3시, 6시, 그리고 오전과 오후 번제드리는 시각에 매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도에 열심인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 한명은 기도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 제자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라고 하셨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기도는 어떤 기도인지를 보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 고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합니다. “아버지여…”
기도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도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는 종교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주유소에서 일을 할 때에 함께 일하던 이집트 남자분이 있으셨습니다. 정해진 기도시간이 되면 작업실 귀퉁이에 가서, 바닥에 담요를 깔고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유소 주인은 기독교인이어서 눈치도 보였을텐데, 이에 굴하지 않고 기도에 열심을 내는 모습이 저에게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그 주유소에 가보니 그 전처럼 열심히 기도하지는 않으시더라구요.
그런데 무슬림이 기도할 때에 알라신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는 알라의 이름이 99개나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아버지’란 말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여러 호칭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무엇보다 우리의 기도를 이루어주시는 전능하신 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니 우리가 어떠한 어렵고 힘든 일을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다 이루어주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하나님에 대한 호칭 중에 ‘아버지여’ 라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다 성취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이전에,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인지를 앎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신 분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 듣기 좋아하는 호칭이 있습니다. ‘아빠’입니다. 만약 제 아이들이 저에게 ‘배 목사님, 미스터 배’ 라고 부른다면 아주 서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와 아이들 사이에 있는 부모와 자녀간의 특별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저희 아이들이 저에게 이것저것들을 요구할 때에, 그것을 경청하고 그 말들을 들어주고자 하는 것은, 제가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제가 그 아이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아이들이 저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요구한다면, “네 아버지께 가서 말씀드리렴…” 하겠지요.
보통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창조자, 전능자, 초월적인 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감히 부를 수도 없는 거룩하고 존귀하신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특권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고자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더욱 친밀해 지고자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임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사랑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2.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부모님은 어릴때부터 자녀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관심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로 아이들이 자신의 필요를 알지 못해도,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이를 공급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39:1-4절에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알고 계시는지를 시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니, 그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이를 채워주시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11절에서 아버지는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여러분이 아이가 “아빠 생선 주세요” 그러는데, “생선이 없으니 여기 뱀이나 가지렴” 하고 뱀을 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필요를 알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힘쓰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지금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좋은 성적입니까? 좋은 성품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13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의 아버지와는 달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적인 필요까지 아시고, 이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영적인 필요가 아니라 세상적인 필요만을 채워달라고 한다면, 성령님을 준비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까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갈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소유의 부족함은 금방 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소유를 채우기 위해서 애쓰며 기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영적인 부분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고, 구하지 못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님을 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의 믿음이 바로서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영적인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무력으로 로마제국에 대해서 항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독립된 나라가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나라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이 사는 나라들은 다 다르지만 대부분 바라는 나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라, 내가 왕이 되는 나라를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이를 요약해 보면, “하나님,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내 나라를 이루게 해 주세요, 내 가정이, 일터가, 교회가 내 나라가 되게 해 주세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가 아니라 ‘그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뭔가 간구할 것이 있을 때입니다. 뭔가 아쉬움이 있고, 부족한 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는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뭘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입니까? 그 기도 내용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우리 일터와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때에, 먼저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20-21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하나님을 모시고 그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갈 때에 내 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과 그 다스림이 없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다스리고 계십니까? 나의 감정과 생각이 나를 다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내 안에 이루어질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를 통하여 내 가정, 내 일터, 내 교회, 이 사회에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있다 저기있다고 말하기 전에,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부하던지 가난하던지, 건강하던지, 약하던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든지, 그렇지 않은 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주님의 통치가운데 있으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기도하시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피곤하고 힘드셔도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가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기도는 어떤 사람의 관계보다 하나님의 관계가 우선적이고 중요함을 드러내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만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까지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친밀하게 여기신다는 증표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각자가 왕이 된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데, 성도들은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시고, 그 뜻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 가정, 일터, 교회, 이 사회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사랑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이 되기를 원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심령과 우리 삶가운데 더욱 임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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