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8/2022 - 당신의 에덴은 어디입니까? [창세기 2:4-9]
https://youtu.be/RaTZlMzYj5E
여러분,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육일동안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그 어디보다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주 좋으셨을 것입니다. 그 동안 보시기에 좋았던 모든 피조물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으셨으니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즐거움이 되기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존재, 즐거운 존재가 되는 것은 참 가치있는 일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우리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좋게 하기 위해 수고를 했던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기쁘게 하기 위해 힘쓰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은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관심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정받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자녀들이 부모님 날에 써 준 카드에, “엄마 아빠가 내 부모님이라서 너무 좋아요.” 라고 한다면 얼마나 감동이 되겠습니까? 사업하시는 분들은 고객들이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비스가 참 좋습니다’ 라는 말에 힘을 얻고, 일의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보실 때에, “아무개야, 내가 너를 보니, 내가 참 좋구나…”라고 하신다면, 그것보다 더 큰 찬사는 없을 것입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피조물들이 함께 모여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덴의 성격을 그 이름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에덴이라는 단어는 히브리 어근 ‘아단’ 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아단은 ‘즐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본에는 에덴동산을 ‘기쁨의 동산’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셨을 때에, 피조물들이 그곳에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어떤 것들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십니까? 코비다-19이나 인플레이션,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피곤하고 지치기 쉬운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에덴동산에서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살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시는 기쁨이 누려지기를 축원합니다.
1. 에덴 동산은 정말 낙원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먹을 것도 풍성했고, 사람이나 짐승들이 서로 해함이 없이 모두 풀을 뜯으며 평화스럽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이 염려없이 먹고 살기에 적합한 곳이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함께 거주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실 때에 자신이 만드신 것을 모아 놓고 그것을 보시면서 즐기시고자, 관상용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마치 사람들이 동물원이나 사파리 공원을 만들어 놓고 즐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과 함께 거하시고자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로 계시지 않고, 당신이 만든 사람들, 짐승들, 피조물들과 관계하면서 사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에덴 동산이 기쁨의 동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속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3:8절에 보면, 바람이 부는 날,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며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연예인을 보는 것도 신기한데, 하나님을 보며 함께 거주한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특별히 에덴동산에 하나님, 아담과 하와는 얼마나 친밀했겠습니까?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둘 밖에 없었으니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최고의 친밀함을 이루며 살았던 것입니다. 나를 만드시고 좋아해 주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참 행복하고 기쁜 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과 수다를 떨기도 했을 것이고요, 하나님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 보며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 아담과 하와가 서로 싸웠을 때에 누가 잘못했는지를 물어 보자고 하나님께로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친밀하게 돌보아 주셨고, 그 둘은 이를 누리며 기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기쁘다 못해 황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희게 변하셨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시는 장면을 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오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황홀해서 어쩔줄 몰랐습니다. 오죽했으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는 많은 염려와 문제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그 문제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기쁨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속에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친밀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남자분이 간증을 하셨는데 그에게는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둘은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시절에 형이 동생을 보니까 동생에게는 뭔지 모를 기쁨이 있어 보였다고 합니다. 그 기쁨을 본 형이 동생에게 있는 기쁨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 동생이 하는 것처럼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는데, 자신은 그게 잘 안되더랍니다. 어쩔 수 없이 동생에게 뭐가 그렇게 기쁘냐고 했더니, 동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이는 형도 아는 내용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은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음을 믿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속에서 살아가니까 기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죄로 인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니, 사람들을 붙들고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자신의 기대에 못미칠 때에 실망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 누구와 교제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가장 기쁜일이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다면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와 말씀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그 만남 가운데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에, 고향 교회의 중고등부들이 매일 저녁마다 모여서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겨울에 난로를 피우고, 10여명의 아이들이 십자가를 향하여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받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많은 애들이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고향교회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저를 포함에서 목사가 3명이 나오고, 전도사, 사모님이 나왔습니다.
혹시 삶에 기쁨이 없고 힘들고 우울하십니까? 사람에게 기대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만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주변을 서성이도록 만들지 마시고, 하나님을 구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기도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때에, 사람이나 세상에서 주지 못하는 신령한 기쁨과 평안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기쁨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존재였기 때문에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스리라고 권위도 주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출생할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때에, 아무 사람이나 그 아이의 이름을 짓지 않습니다. 그 아이를 의미있어 하는 사람이 이름을 짓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들어보셨을 시 중에, 김춘수라는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가 나에게 의미가 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이름을 지으시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라고 합니다. 아담은 각 짐승들의 모습을 보며, 풍기는 이미지를 생각하며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애완동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주인의 모습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그 동물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과 하와의 이름을 지어 주셨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이름만 부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다 알고 계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잘 왔다고 좋아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을 늘 부르면서 지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는 의미의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사람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애정을 가지고 서로 불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의미있는 존재임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제 아내가 하준이와 통화를 할 때에 종종 질투를 느낍니다. 전화를 받을 때에 그 목소리가 틀려집니다. “하준아~” 그 이름을 부를 때에 그 표정도 달라집니다. 그 얼굴이 밝아집니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여보, 나를 좀 그렇게 불러줘 봐” 하면서 질투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부를 때에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한 번 불러 보세요. 한번 옆에 있는 분을 보시면서, 당신은 내가 사랑하고,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한번 이름을 불러봐주세요.
우리가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에, 우리가 에덴에서의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에덴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의 기쁨을 영원히 누리지 못합니다. 뱀에게 속아서 하나님께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에는 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1절에 뱀을 소개하기를,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뱀을 다른 짐승보다 똑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뱀은 하나님이 주신 똑똑함을 가지고 악한 일에 사용하게 됩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재능이 많은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그 똑똑함이 쓰여질 때에 그것은 악하고 거짓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뱀이 하와에게 했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 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는데, 뱀은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하와야,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 아셨기 때문에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하셨어”
뱀의 말을 들은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토록 친밀한 관계를 잃어 버리고,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을 잃어 버린 것은, 뱀이 거짓으로 인한 것이기 보다는, 그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자신도 하나님이 되어서 선악을 알 수 있다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욱 신뢰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구요? 하와의 입장에서 만약 사탄의 말이 틀리다면,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정녕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와가 뱀의 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와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셨고, 뱀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에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만약 뱀의 말이 맞다고 하와가 생각했을 지라도, 그녀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굳이 따먹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분별해 주시는데 내가 그것을 알 필요가 무엇이 있어?” 하고 뱀의 말에 참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마음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선한 분이라고 일컫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우리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옳다. 너는 그르다는 논쟁과 분열이 끊이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손의 후유증입니다.
우리는 에덴의 기쁨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악의 분별은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에덴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같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에덴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면서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속에서 살아갈 때에, 에덴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관계는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친밀하고자 노력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고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른 관계속에서 있을 때에,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지 못하고 상대방을 악하다고 말합니다. 아담은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한 여자가 그 열매를 주었다.”고 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자신도 피해자 인것처럼 말합니다. 하와는 뱀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했습니다. 선과 악의 처분은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에덴의 기쁨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를 통해서 왔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을 때에, 사람들과도 바른 친밀함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오늘날, 창세기의 에덴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속에 있을 때에 주시는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슬프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늘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심으로, 세상이 주지 못하는 신령한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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