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KO_wQmh-E
사람들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즐거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즐겁지 못한 일들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믿음생활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즐겁게 믿음생활을 했으면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믿음생활이 즐겁지 못하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성도는 자신의 즐거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인들을 향해서 성도들은 어떤 것으로 즐거워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가지는 즐거움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교회에 가면 친구들과 선후배가 있었고, 함께 예배드리고 활동하고 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아주 즐거운 기억들이 교회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고, 이것은 세상에서 주지 못하는 것임을 종종 경험합니다.
믿음생활의 즐거움이 사람과의 교제속에만 국한이 되어있다면 가장 중요한 즐거움을 잊어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사도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누릴 즐거움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따진다면 로마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모여든 향락문화가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음주와 가무를 즐겼습니다. 노예를 부리면서 풍요와 편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로마에는 그 옛날에 공중 목욕탕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스파’가 아주 유명하지만, 로마도 만만치 않습니다. 로마의 전성기에는 1,6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그 안에 도서관, 식당, 체육관 등이 있는 목욕탕이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따진다면 교회보다는 교회 밖이 더욱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도의 즐거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즐거움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말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누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이미 주신 즐거움에 대해서 깨닫고, 언제나 이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먼저 축원합니다.
1. 먼저, 성도가 누리는 즐거움은 하나님과 화평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누구와 불화해 보신적 있으십니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가족 중에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집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가출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 일터에 불화한 사람이 있다면 다른 직장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사람과 불편한 관계가 있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걱정이 됩니다. 관계가 불화한 사람이 있다면, 보통 그 사람을 피하거나 떨어져 있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를 맺게 되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해지는 분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면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영원토록 헤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은 하나님이 안 계신 지옥에 영원토록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죄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가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갈라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평하기 위해서 모든 화해의 과정을 Full Service 로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1) 먼저 죄인된 사람들과 화목하기 위해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심각한 결과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죄인을 사랑하셔서 먼저 화평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2)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방법도 알지 못하는데, 손수 그 방법을 찾으셔서 행해주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화평을 말하지만 그 화평을 만들어가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적인 화평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국가간에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각 나라들은 그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핵무기로 무장하면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로마서가 쓰여지는 당시에, 로마제국이 주장하는 화평이 있었습니다.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는 로마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른 나라를 제압함으로 이룬 평화를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로마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어나게 되면 로마제국은 그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잔인하게 처형했습니다. 로마제국은 다른 이들을 죽이고 제압함으로 그들만의 평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화평을 말하지만, 그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내려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푸신 화평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죽이심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의 화평을 막는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죄의 대가를 다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대가를 치러주심으로,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뭐 잘 한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된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계속 죄가운데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죄인된 나와 화평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된 저와 여러분들과 화평하기 위해서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 성도는 바라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 동안 세상만을 바라보며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기 전에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높아지고, 칭송을 받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밤낮으로 수고하며, 사람들과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시받는 것을 못견뎌하며, 자신이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2:16-17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자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화평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를 위해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이 낮아진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자신이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동안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었던 학문과 명예와 권력을 쓰레기처럼 버렸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에, 우리가 바라보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낮아지고 초라하게 산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늘의 영광이 준비되어져 있습니다.
3. 그리고 성도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했습니다. 환난은 헬라어로 ‘들립시스’ 곧 ‘압박, 강하게 누름, 시련’이라는 뜻입니다. 환난은 나를 꽉 눌러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러한 환난의 상황을 만날 때에 이를 즐거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환란과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점을 치고, 돈을 벌어서 환난을 당하지 않도록 대비합니다. 환난을 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수고를 합니다. 그럼에도 환난이 오고, 환난 중에 오래 있다가 보면 사람들이 소망을 잃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정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환난을 즐거워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실 때에 이는 멸망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이루게 하시고자 하심입니다.
1) 먼저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즐거워해야 할 것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환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환난이 많은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영적인 도전들이 많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환난을 당할 때에, 승리를 기대하며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환난은 인내를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에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기 전에는 나의 믿음이 어느 정도 견고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환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어떤 상태인지가 드러납니다. 잠깐의 환난은 견딜만 합니다. 그런데 환난이 그치지 않고, 상황도 바뀌지 않고 지속될 때에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인내의 과정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환난을 인내하는 힘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고 의지함으로 인내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1: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상급은 환난 날에 믿음으로 인내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더욱 인내하십시오. 인내하기에 힘이 부친다면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께서 인내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3)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이룹니다. 연단은 시험하여 확증함을 말합니다.
금이 순금으로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연단의 과정을 거칩니다. 불순물이 섞인 금이 용광로에 던져질 때에, 금이 녹으면서 그 안에 있는 불순물이 태워집니다. 그리고 깨끗한 정금만 남습니다. 뜨거운 불의 과정을 통과한 금만이 정금으로 확증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이 정결케 되는 것도 환난을 온전히 인내하고 거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에 있던 세상의 더러운 것들, 불신앙의 불순물들이 빠져 나갑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순전한 믿음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23:10절에,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은 동방에 의인으로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환난으로 단련시키셔서 그의 믿음의 정금같이 되게 하셨습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영국 어느 지방에 등뼈에 병이 생겨 40여 년이나 자리에 누워 고생하는 덴데라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이 참으로 좋아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천국을 경험했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무디 선생님이 영국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에 덴데라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디는 바쁜 일과 중에도 신앙 좋은 덴데라를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덴데라 방에 들어가 그를 위하여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무디 선생은 덴데라에게 “얼마나 괴롭습니까?”라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때 덴데라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풍기면서 말하였습니다.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도 지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천당에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는 감사할 것뿐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무디 선생님은 덴데라의 방에서 나오면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 천국을 맛보았다”
40년간 자리에 누워서 고생하는 하는 덴데라의 소망을, 예수님은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국의 소망을 이루심으로, 우리의 소망을 온전히 이루어 주십니다.
밀란(Milan)의 대성당에는 들어가는 문이 셋이 있는데 그 문들마다 그림과 함께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첫째 문 아취에는 조각된 장미화환이 있고, 그 아래에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는 글이 새겨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 문에는 십자가가 조각되어 있고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땅에서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성도가 가지는 소망은 이 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이들은 절망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누려야 할 참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즐거움은 이 세상의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한시적이고, 헛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은 영원하고,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즐거움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어떤 사람들보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로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을 이루게 합니다. 이를 생각하면 하나님과의 화평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즐거움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인생은 멸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도, 이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누려야 즐거움입니다.
또한 환난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환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표입니다. 그리고 인내와 연단을 통해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우리의 소망이 되심을 환난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을 발견하고 이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늘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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