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3/2022 - 담대한 제자들 [사도행전 4:13-21]
https://youtu.be/xveDM0rNkIs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삶에 변화가 오게 되는데, 그 변화 중에 하나가 담대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제자의 삶은 환난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상대할 때에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도 세상을 이기는 승리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어떠한 담대함이 생기셨습니까? 예수님은 담대하라고 하는데, 세상 염려에 눌려서, 제대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당부처럼,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다가 공회원들에 눈밖에 나게 되고,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소환을 했습니다.
공회라고 하는 곳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권력기관이었습니다. 구성원들도 대단합니다. 대제사장들, 장로들,서기관들, 관리 등과 같이 유대사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공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공회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잡혔습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제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잡아서 처벌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공회원들 앞에 서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고양이 앞에 쥐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의 모습은 쥐와 같은 겁먹은 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하는 사자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공회원들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학문없는 범인이라고 여겼는데, 말하는 것도 똑똑하고, 또한 담대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공회앞에서 담대하게 행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을 향한 성도의 담대함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 여러 도전과 유혹들을 받지만, 담대하게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1.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확실할 때에,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4:2절에 보면, 공회원들이 제자들을 잡아 온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고, 제자들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공회에 잡히기 전에 있었던 기록을 보면, 사람들이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 숫자가 남자만 오천명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보면서, 공회원들은 제자들이 유대 공동체를 위협할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지도력을 훼방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공회원들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
이 질문은 왜 제자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통제가운데 있지 않는냐는 질책과도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공회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고, 그들의 말대로 유대사회를 통제하고 이끌어가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의 허락도 없이, 예수의 이름을 전파함으로 유대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여겨, 공회원들은 제자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공회의 말을 듣고서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는데,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명확하게 그들에게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술 더뜹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병자를 고칠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 천하 사람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공포를 합니다. 제자들은 공회원들 앞에 있었지만,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 이심을 증거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회원들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문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학문이 자신들을 담대하게 만든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배운 것도 없는데, 담대하고 똑똑하게 말하니, 이상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말을 할 때에 언제 담대해지게 됩니까? 내가 확신하며 경험한 일에 대해서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제자들은 처음부터 담대했던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로마병정들에게 잡히실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서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의 마당까지 갔지만, 여종의 한 마디 말에 겁을 먹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도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았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20절에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와 여러분에게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미문 앞의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름, 능력이 이름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확신할 때에, 우리는 담대하게 세상과 맞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도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돈이 최고야,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말아, 내가 네 문제를 해결해 줄테니까 나만 믿어…”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이보다 더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그 이름의 능력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구원할 존재는 세상의 권력과 돈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며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의 환난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승리케 해 주시는 분임을 확신하십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확신할 때에, 우리는 세상의 환난과 유혹에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제자들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말을 들은 공회원들은 당황을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말을 거짓이라고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 제자들을 통해 일어난 표적들이 예루살렘에 이미 다 알려져 있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나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난감한 상황에서 공회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하기 위해서, 제자들과 일행들을 공회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이나 가르침이 민간에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고 합니다.
공회원들은 의논을 마친 후 제자들과 일행을 다시 공회앞에 불러서 제자들을 위협합니다. “너희들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고 단단히 주의를 줍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그 사회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커다란 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해 주신 이름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가지고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도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회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할 유일한 이름으로 예수님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죄로부터 구원받을 길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엄청난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도록 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사탄의 계략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제가 아는 군대 채플린이 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군대에서 기도를 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되어 있답니다. 군대에서는 예수님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며 기도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국가행사에서도 기독교 목사가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타당한 사회적인 이유를 들어서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 볼 때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이 땅에서 제거함으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계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회의 위협을 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이 위협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반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고 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공회의 말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담대하게 말하는데, 이 담대함은, 자신들이 누구앞에 서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베드로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앞에 서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육안으로 볼 때에 그들은 공회원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늘 인식하면서 살았습니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 있음을 늘 인지하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139편은 다윗의 시인데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7-10)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늘 인식하면서, 그 믿음에 근거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믿을 때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달을 때에, 믿음가운데 환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달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함께 했던 공회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판단하고 행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자신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공회원들 앞에 담대하게 말합니다. “판단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옳은가 판단하라” 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변화되는 것은 바로 판단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세상의 문화나 가치관, 그리고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말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다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담대하게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제자들의 담대함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았지만, 그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두려웠고,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담대한 자로 변화된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공회앞에 섰을 때에 그들의 상태는 성령충만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대하게 말씀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른 판단하게 한 것도 그들의 판단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믿음생활을 했고, 인생의 경험이 많고, 똑똑한 사고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이 영적인 세계는 성령의 다스림이 없으면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합니다. “너희들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를 통해서 듣게 됩니까? 성령님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소개하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바른 믿음, 말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시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행하게 됩니다.
성도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성령 충만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절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간절히 구할 때에 선하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판단하고 담대하게 행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대하면서 위축되어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환난과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담대하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도가 가지는 담대함은 인간적인 담대함이 아닙니다. 나에게 재력과 권력과 건강이 있어서 담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확신함으로 오는 담대함입니다. 설령 우리의 몸이 해함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심을 믿기에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판단하시길 것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주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에 방종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앞에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경외의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가운데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담대하게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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