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D4iYkCcGW7w
우리는 지난 주일 말씀에,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셨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빛되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빛으로 나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빛되신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어둠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3: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세상에 빛이 비치면 모든 이들이 빛으로 올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행위가 악한 사람들은 빛으로 오면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되니까 도리어 어둠을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죄악을 행한 다음에 한 일은 그들의 죄악이 드러날까봐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는 일이었습니다. 죄는 빛되신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하며 어둠에 머무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둠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은 참 무지합니다. 작년 겨울에 한파로 인해서 전기공급이 중단되었을 때에, 전기불이 없어 빛이 없는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빛이 없으니까 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멀지도 않은 화장실을 가는데도 벽을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가야만 했습니다. 마치 제가 바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영적인 어둠에 있을 때에 그렇습니다. 영적인 어둠속에 있으면 내가 죄가운데 있어도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죄의 결과가 사망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어둠가운데 있으니 사망을 향해 가면서도 이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똑똑하고 건강하고, 부유하다고 할지라도, 영적 어두운 가운데 있으면 무지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들에 대한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더 이상 어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빛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곧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는 빛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죄가 드러나고, 회개함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받습니다. 빛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앞에 나와 예배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소중하게 여기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 바울이 빛의 자녀가 된 에베소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빛이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빛의 자녀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행함을 통해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시원치 않고, 죄악을 즐겨행한다면 빛의 자녀로 합당하지 않은 삶인 것입니다.
바울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빛의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가치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짐으로 빛의 열매를 이루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얼마나 빛의 자녀로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지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빛의 자녀는 모든 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요즘 여자분들 중에 연애 상대로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분들은 자신을 막대해주는 남자의 터프함에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분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나쁜 남자중에는 사귀는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 표현방법이 좀 거친 사람이 있고, 또 어떤 나쁜 남자는 그냥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쁜 남자에게 걸리면 큰 일 납니다.
그런데 빛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모든 착함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가 착하게 행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꿇어 앉아서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선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선의 기준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 중에 자기 자신을 아주 선한 존재처럼 여긴다고 하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너무 선한 존재로 여기지 마시고, 도리어 내 죄성을 늘 살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은 죄인된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악은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지만, 선은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착한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자신들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함께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벧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룻의 가축의 목자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과 룻의 가축들이 많아서 함께 가축들을 먹이기에 목초지가 넉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나이가 많고, 가족의 어른이라고 자신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는 룻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한 친족이니 싸우지 말자. 그리고 네 앞에 온 땅이 있으니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먼저 택하여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위해서 가장 좋은 목초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롯에게 양보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조카롯을 위해서 자신이 손해 볼만한 선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함은 악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로마서 12:17절에,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면, 심지어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에게도 선을 베풀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의 선함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나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이타적인 선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빛의 자녀인 것입니다.
2. 그리고 빛이 자녀에게는 의로움의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시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의 선하심은 의로움을 기초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신다고 의로움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지은 죄의 대가를 대신해서 치러야 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덕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그 죄의 대가를 치르셨고, 의를 이루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함이라는 것은 때로 상대적일 수 있습니다. 내가 선함으로 행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악을 행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독일 출신의 미국 정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 Arendt) 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2차세계 대전 당시 독일 나찌의 친위대 장교였는데, 그는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와 학살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전쟁 후 아르헨티나에 피신해 있다가 15년 만에 잡혀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아이히만이 전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신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법 앞에서는 무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네 아이의 사랑스러운 아버지였고, 단지 충실한 국가공무원이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며, 유태인들을 좋아했지만 국가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수행했다고 항변합니다. 잔인하게 살해되느니 당시 ‘안락사’라고 일컬어지는 가스실의 죽음이 훨씬 덜 잔인하고 인간적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살아남았던 유태인 중 한 사람이 아이히만을 법정에서 보고 기절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당시의 충격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 예상하며 그 사람에게 기절했던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전혀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아이히만이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저토록 평범한 인간이 그 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몰아넣었군요. 나 자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 내 안에도 아이히만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아이히만은 독일의 나치의 입장에서 보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뜻을 따라 충성스럽게 복종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보기에는 그는 무죄한 수 많은 사람을 학살하는데 가담한 사람이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도 책임지려고도 하지 않는 극히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빛의 자녀들이 행하는 착함은 하나님의 의에 기초해야 합니다. 의로움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착하고 의로운 것인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선함과 의로움의 삶은, 일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하나님의 지지를 받을 때에 참된 선함과 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빛의 자녀들이 맺는 열매는 진실함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람들 중에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 속아서, 진리를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마귀에게서 난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대표적인 거짓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거짓말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은 죄인이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할 존재라고 사람들을 속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거짓에 속아서 진리를 거슬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그 거짓에 속아 예수님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 즐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결국 사탄에서 속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마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심, 탐욕을 따라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실되지 못하고 거짓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속입니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말합니다. 불의한 것을 의롭다고 말하며 세상을 속이고 성도를 속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거짓에 속아 삽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겠니?”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그러니 그 사람하고는 상종하지도 마” “세상 사람들도 다하는 일이니, 해도 문제 안돼….” 마귀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합니다.
하지만 빛의 자녀인 성도들은 진실을 말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솔직해야 되고, 다른 이들에게도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안에서 가족에게 진실해야 합니다. 가정이 깨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어질 때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 땅에 얼마나 거짓이 만연하고 있습니까? 서로 엇갈린 주장을 가지고 자신의 말이 옳다고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상대방을 해하는 일들도 만연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이 세상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빛의 자녀는 거짓된 사회에서 진리를 말하며 이를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 때에 이 땅에 만연한 거짓의 어둠을 이기고,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열매없는 어둠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고 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지만, 열매없는 어둠의 일은 악함과 불의와 거짓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마귀의 일이며 결국 사망에 이르는 허무한 것들입니다. 성도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빛의 자녀로서 열매맺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진실된 모습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열매로 맺어 나갈 때에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14절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영적으로 잠자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 빛의 자녀요, 영적으로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곧 영적으로 잠든 성도, 잠든 가정, 잠든 교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빛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어둠속에서 죽은 자와 같이 잠들어 있는 성도, 가정 교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빛되신 주님께로 날마다 가까이 나아가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그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하는데 힘쓰시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잠자던 우리의 영혼이 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빛이 열매를 맺는 삶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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