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1RakwfrUVTY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첫번째 나타나셨던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두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유는 도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첫번째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나중에 도마가 왔습니다. 도마를 본 제자들이 도마에게 무엇을 전했겠습니까? 제자들은 흥분해서 도마에게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들의 말을 듣고도 반응이 냉냉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합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한 도마의 입장에서도 답답하지만, 도마의 말을 듣는10명의 제자들에게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사진이라고 찍든지, 동영상을 찍어서 보여주었으면 좋으련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도마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후, 여드레가 지나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집안에 문을 닫고 있었는데 그 전과 마찬가지로 문을 통과해서 오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서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첫번째와 같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며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도마앞에 나타신 것 만으로도 더 이상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저와 여러분들도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도마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자세는 무엇인지를 보면서, 우리의 믿음이 무엇에 기초해야 할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리는 도마를 볼 때에 왜 저렇게 믿음이 없을까? 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도마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믿고자 할 때에는 그 믿음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학생을 가르칠 때에 교실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실습을 하기도 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도마를 “의심많은 도마”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마만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사실 도마와 같은 태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온 여인들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고 전했을 때에 제자들은 이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부활하신 것을 보게 되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도마가 도저히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할 때에 정말 답답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도마가 자신이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거짓은 아닌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실제할 수 있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근거를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국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주도에는 ‘도깨비 도로’라는 곳이 있습니다. 눈에 보기에는 내리막 길인데 실제로는 오르막인 길입니다. 1981년 제주도로 신혼 여행을 온 어느 신혼부부가 택시에서 내려 사진을 찍으려 하자 택시 기사가 차를 세워 놓고 시동을 끄고 사진찍는 동안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워 둔 차가 오르막길로 슬금슬금 굴러 올라가더라는 겁니다.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알고보니 그곳은 착시가 일어나는 도로였습니다. 그 길은 오르막이 길이지만 눈으로는 내리막처럼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몸의 감각으로 경험한 것만이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신의 감각으로 보거나 느낄 수 없는 실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믿음의 영역, 영적인 영역은 우리의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하나님, 천국, 지옥, 천사, 귀신들과 같은 것들은 우리의 육신적인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없다고 그것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내가 보고 듣는 것, 감각하는 것에 두게 되면, 우리는 그 뒤에서 역사하는 영적인 세계, 믿음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눈에 보이는 것에 기초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영역 너머에 있는 실체를 믿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이제 예수님은 도마의 믿음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 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방문할 때에 도마가 없으실 때에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다 모여있는 때도 있었을 텐데 의도적으로 도마가 없을 때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셨다고 말해도 도마가 불신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두번째 찾아오셔서, 우리의 믿음이 무엇에 근거해야 할지를 알려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보고서 믿지 않으면, 뭘 근거로 해서 믿으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과 감각을 가지고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실체를 경험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세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믿음으로 행동하였다면 정말 복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지 못하고, 겨우 보고서 믿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의 집앞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가 있었는데 그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부자도 죽었는데 그는 음부의 불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부자가 고통가운데서 땅에 있는 자기의 형제들을 생각하며,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합니다. ‘나사로를 자신의 아버지의 집에 보내셔서, 자신의 다섯 형제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 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런데 부자가 말합니다. “그렇지 아니합니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 하지만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믿는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그들은 참 많은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자신들의 생각, 이성이 맞지 않는다고 믿지 않을 때에, 그 일들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된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로,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믿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사람의 이성과 경험 너머에 있는 영적인 세계까지 알게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보지 않고서도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지지 않는 신앙의 일이 있으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 이제 예수님을 본 도마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 전에, 베드로의 고백이 먼저 있었습니다.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은 했지만 사실, 예수님을 죽으실 때에 그들은 그 믿음의 고백대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저런 고통과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믿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눈으로 보고 믿음을 잃어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임을 믿었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여러가지 불신앙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진정한 나의 주인, 하나님임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의 한 작은 호텔에 새로 채용된 지배인이 있었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취업을 한 지배인은 일에 대한 의욕이 매우 넘쳐 있었습니다.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온 지배인은 그날의 업무를 파악한 후, 곧 도착하는 직원들에게 청소부터 시켰습니다. 청소를 깨끗하게 마친 뒤 드디어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지배인은 먼저 호텔 내의 로비에 있는 카페를 둘러보았는데 굉장히 낡은 옷을 입은 한 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일행도 없이 혼자 카페 한 가운데 앉아 신문을 보며 가장 싼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지배인은 다른 손님들이 이 초라한 노인을 발견하게 되면 호텔의 이미지가 깎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카운터에서 ‘죄송하지만 커피를 다 마슨 후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저희 호텔에서 나가주시지 않겠습니까? -지배인’ 이라고 쪽지를 적어 노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쪽지를 받은 노인은 커피를 다 마시고 곧 카페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하는 지배인의 앞으로 한 쪽지가 배달되었습니다.
‘내일부터 그만 출근하시오. -사장’ 지배인이 나가달라고 부탁한 초라한 노인은 이 호텔의 사장이었습니다.
그 지배인이 그 노인이 자신을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다면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 누구보다 더 잘 대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초라하게 보이는 노인이 누구인지를 몰랐기에 그에게 무례했고, 도리어 잘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도마는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고, 나의 주인임을 확실히 믿었더라면 그는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말을 들으셨을때에, “당연하지,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당연히 그분께서 말씀대하신대로 다시 사셨겠지…” 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는 하나님이시요, 나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 말씀하시면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주인이시니 우리는 주인된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로 신뢰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주인으로 온전히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무엇에 기초해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나의 경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잇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요,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고백에 기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시요,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어떻게 됩니까? 기독교 역사에 의하면 그는 인도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72년경에, 인도의 말리바라는 곳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로마서 10: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울은 우리의 믿음이 봄에서 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들음이라고 할 때에 이는 능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는 행위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들려진다고 해서 다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요, 하나님이요, 주인임을 믿을 때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봄으로 믿는 것이 이 아니라, 보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믿는 것이 복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은 믿음을 더하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 믿음을 잃게도 만듭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그리고 성경의 말씀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말씀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는 우리의 주인이시요, 하나님이십니다. 그 믿음을 기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과 영생, 신령한 것들을 경험하는 복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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