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ozePC-8ibJg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시는 장면이십니다. 예수님의 두번의 방문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자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러 다니지도 않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무르지 않고 갈릴리바다로 갑니다. 갈릴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장소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기다리겠다고 하신 장소입니다. 베드로와와 제자들은 갈릴리바다로 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합니다(21:3). 그랬더니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함께 갑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오랜 만에 고기를 잡으러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도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수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지금 물고기를 잡을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기를 잡는 어부를 부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는데 그들의 모습은 과거 고기를 낚는 어부로 다시 돌아간 것 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을 낚는 어부보다는 고기를 낚는 어부가 더 익숙하고 편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밤새토록 허탕치는 모습을 예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을 때에, 고기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불을 피워놓으시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을 굽고 있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오래간 만에 보는 제자들에게 하실 많은 말이 있을실텐데 예수님은 그 질문을 하십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에게만 물으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곳에 함께 한 제자들에게, 그리고 여기 모이신 제자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제자들로부터 꼭 확인받아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질문을 하시는지를 살펴 보며,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점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왜 이 질문을 하실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누구한테 이러한 질문을 받아본적이 있으십니까? 참 당황스러운 질문입니다. 만약 제 아내가 저에게, “여보, 당신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해요?” 라고 묻는다면 저는 뭔가 잘못되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긴장할 것입니다. 이 질문은 내가 질문한 사람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나에게 최고의 사랑을 해달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것은 단순히 베드로의 사랑을 받기 위한 질투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순히 지적인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제자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스승이라고 하면 그냥 아는 것을 가르쳐주시면 되는데, 왜 사랑의 관계까지 요구하십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을 다른 것보다 더욱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 이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사랑으로 불리는 여러 단어가 있는데, 예수님이 물으시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을 말합니다.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신실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아가페의 사랑이셨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럼요, 예수님, 저도 예수님을 아가페 사랑합니다.” 라고 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가페 사랑을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를 극구 부정하며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랬더니그 말을 들은 제자들도 자시신들도 함께 죽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5). 예수님을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이 로마군사들에게 잡히시고 십자가의 여정을 걸으실 때에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함께 죽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서 잡혀가신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마당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는 참담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신의 모습에 울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라고 하셨을 때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죽기까지 사랑합니다. 아가파오 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필레오 합니다.” ‘필레오’ 도 사랑을 말하는데, 이는 친구간의 사랑, 우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토록 사랑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린 것에 대해서 따져 물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 어떤 것보다 더욱 사랑할때에 예수님을 따를 수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7-38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어떤 사랑의 관계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곧 자기를 부인하면서 까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나타나면, 예수님을 버리고 그것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마태복음 10:39절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의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럴 때에 목숨을 얻는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다른 것에 빼앗기며 살지는 않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버렸다지만, 우리는 너무 사소한 것으로 예수님을 버리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까? 제가 어릴 때에 주일에 교회가는 것을 붙들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텔레비젼에서 만화영화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못보고 가는 것이 정말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좋아해서 예수님을 버리고 그것을 따르지는 않습니까? 돈이 생기는 일이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뒤로하고 돈을 추구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사람들과 가까와 지기는 애를 쓰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과의 교제는 외면하며 멀리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 예수님 말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예수님을 최고의 사랑의 관계로 맺을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살다가보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기쁨으로 당신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에 자신있게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겸손히 대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함으로 서로를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두번째 질문도 “나를 아가파오하느냐?” 라고 묻지만, 베드로는 “‘필레오’ 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번째 물으실 때에 예수님은 질문을 바꾸십니다.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번씩이나 물으시니 근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 “네가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했을 때에 베드로는 자신있게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거든요. 베드로는 근심하면서 세번째 대답을 합니다. “내가 필레오 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아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지를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지극히 낮아졌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결심을 앞세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에 맡겨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실 때마다 그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양을 맡기십니다. 그 양들은 제자들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양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0: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목자가 양을 위하여 자신의 귀중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목자가 양들을 위해 죽을 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의 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고 치라고 맡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양육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시는 그 양을 “내 어린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 큰 양도 목자의 손길이 꼭 필요한데, 어린양은 얼마나 목자의 돌봄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양들을 돌볼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양을 맡겼지만 사실 베드로도 예수님의 양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에게는 양의 습성이 있습니다. 이사야 53: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릇행함을 아십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사랑해 주셨습니다. 제자 베드로를 사랑해 주셨고, 제자들을 사랑해 주셨습다. 양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그것도 어린 양들입니다. 우리의 미성숙함을 알고, 그릇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며, 그 모습이 나의 모습임을 깨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어린양들을 사랑으로 돌보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사랑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20,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눈에 보이는 우리의 이웃, 가족, 교우들을 사랑함으로 확증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목숨까지 버리시고 사랑하셨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또한 그의 양들인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하는 여러 유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재미있고 세상적인 성공을 가지고 올 수 있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한눈 팔지 않고 하루하루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예수님이 사랑하는 어린 양들을 돌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 예수님의 양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양과 같이 연약하고 어리석음을 깨닫고, 서로를 사랑함으로 돌보고 섬기는 일을 주님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눈에 보이는 서로를 사랑함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모든 것을 말씀하신 후에,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제자된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함에 기초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양된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며, 주님의 구원의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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