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Fl0WfaJZueY
지난 한 주간은 추수감사절 주간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때보다 더 주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감사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도자양육 사역(Leadership Ministries)을 하고 있는 존 에드 메써손(John Ed Mathison) 의 글 중에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에 대해서 논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둘은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감옥은 죄인들이 잡혀서 강제로 들어간 곳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은 스스로 경건의 삶을 위해서, 때로는 목회의 길을 걷기 위해서 자원해서 들어간 곳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세상과 차단된 공갑니다. 높은 담장을 세워놓고 외부의 사람들을 통제합니다. 그리고 그안에서의 생활은 제약이 있습니다. 자신 마음대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생활 규율에 맞춰서 절제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감옥과 수도원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사에 관한 것입니다. 수도원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있지만, 교도소는 대부분 감사가 아니라 불평이 지배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그의 글의 결론을 말하자면 “만약 죄수가 감사하며 산다면 교도수는 수도원이 될 것이요, 수도사가 불평하며 산다면 수도원은 감옥이 된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수도원에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불평속에서 스스로 감옥에 갇혀서 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감사'입니다. 그것도 조건적인 감사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없는데도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억지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감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기에 감사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는다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면, 때로 시험이나 어려움도 필요하시기 때문에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바울은 골로새교인들에게 감사하는 자라가 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도가 감사해야 할 내용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지를 말씀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골로새교인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아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신 이유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의 평강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평강은 세상에서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평안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이를 추구하며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재물을 가짐으로 불안하지 않고 평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한 사람이 되면 평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 힘을 씁니다. 하지만 내가 풍요해지고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삶이 평강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풍요와 강함을 차지하기위해 싸우기 일수입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와 하마스와의 전쟁이 잠시 휴전에 들어갔지만 그들 간에 평안은 묘연합니다. 이번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전쟁 기간동안 미국에서 유대인들의 총기 구매가 급증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가지는 불안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지만 , 우리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2.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에 다스림을 받는 분이 있습니다. 기분이 좋고 나쁘고에 따라서 삶이 평안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욕심의 지배를 받는 분들도 계십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마음이 평강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불만에 쌓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의 말의 지배를 받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말을 하면 한없이 평강을 누리다가, 조금이라도 섭섭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그 마음의 평강이 사라져 버리기 쉽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리리 지방을 떠나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에 있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한 이방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아주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 말씀은 곧 이방 여인이 개와 같은 존재이니, 그녀의 아이를 지금 고쳐주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서운하고 불쾌한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녀의 마음은 예수님의 섭섭한 말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그녀는 예수님의 말에 그 평강이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감정에 휘둘려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아이를 고쳐주실 분임을 믿고 반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지배를 받는다면 우리를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아닌 것에 의해 주장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주장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흔들리지 믈아야 합니다.
3.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강을 주장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내 자신을 주님께 맡겨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에 휴스턴에 있는 사촌들과 같이 보냈습니다. 지금 7개월된 어린아이가 있는데 어머니의 품안에서 얼마나 평안한 모습으로 있는지 보기가 참 좋았습니다. 아이는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어머니 품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어머니께 자신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평강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서 전적으로 자신을 주님께 맡길때 가능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자신의 삶을 주님께 맡기지 못한다면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J.C.Penny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사업에 투신했지만 심한 재정난을 겪게 됩니다. 그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으려고 했었고, 그 일로 격리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날 아침, 낙망하고 좌절한 그에게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곳을 찾아갔는데 그곳은 기도회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친숙한 찬송이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그 찬송을 듣고 그의 마음에 큰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좀 돌봐 주십시오" 그리고 그후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나는 마비된 심령으로 풀이 죽어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왔다."
내가 가진 불안과 염려를 어린아이와 같이 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사람들이 내 자신의 삶을 내가 스스로 운영하려고 하니까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계획이나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요. 주님께 내 인생 전체를 맡길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4.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며 평안할 때에 또한 다른 사람들과도 평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평케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과 우리가 평강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로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겠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이들과 평강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상대방의 잘못에서 이유를 찾기 전에,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과 같이, 내 자신을 부인하지 못해서 일어난 것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화평케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내 자신을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 테네시주에 가면 오른발교회(Right foot church)라고 이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단 소속은 형제교단인데 1708년 독일에서 넘어온 교단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성찬식 보다 세족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세족식을 할 때 습관적으로 교인들의 왼발부터 씻어주었습니다.
한 집사님이 세족식을 마치고 목사님께 충고를 했습니다. “목사님, 왜 오른발부터 씻어주지 왼발부터 씻으셨습니까? 오른발이 맞습니다. 다음부터는 오른발부터 씻어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이 가만히 생각을 해 봅니다. “오른발이 먼저면 어떻고 왼발이 먼저면 어떤가? 성경적인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 집사님이 주장하는 것이 마치 무슨 성경적인 권위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 목사가 돼 가지고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이, 무식하다는 듯이, 안타깝다는 듯이 대하는 태도가 괘씸히 여겨졌습니다”
목사님은 그 다음에도 일부러 무시하고 왼발부터 씻었습니다. 사실 마주 보고 있기에 오른손잡이인 목사님이 상대방의 왼발을 씻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그 집사님은 자기를 무시했다고 교인들을 선동하여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이름을 ‘오른발교회’라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을 화평케 하시기 위해 자신을 죽기까지 자신을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나를 부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의 주장을 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서로 평강을 빌며, 데살로니가전서 3:16 말씀을 읽오보겠습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예수님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평강의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에, 예수님의 평강이 우리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맡겨드림으로 주의 평강을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염려거리, 우리의 자녀, 우리의 가족, 우리의 교회, 우리의 장래를 주님께 맡길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우리를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화가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심으로 우리와 관련된 분들과 화평을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가 만연한 이 세대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다스림을 받고, 평강을 누리고, 이를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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