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5MX48BfZwzg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이천년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대림절 기간에 우리에게 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읽으신 본문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에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낮이 아닌 어두운 밤에 예수님께 옵니다. 아마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인 그가, 당시 문제성이 있어 보이는 젊은 청년을 만나러 가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꺼려짐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온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온 니고데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보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고 대적했는데, 니고데모는 도리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과 함께 하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도 이 니고데모와 같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면서, 그 뒤에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가운데 보이는 현상의 뒷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 뜻을 헤아리고자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었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된 마음으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면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것은 구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하게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보내신 이유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주시려고,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시고자 그토록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20:31절에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오신 이유와 일치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힘입어 생명,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사람들의 영생에 관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도 영원히 살기를 관심하며 동경합니다.
역사상 영생을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진시황제입니다. 그는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왕입니다. 이런 진시황제가 영원히 죽지 않게 하는 약초를 구해오라고 신하들에게 시켰는데, 서복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불노초를 구해오겠다며, 왕으로부터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을 받아서 약초를 구하러 떠났습니다. 그런데 불노초를 구하러 떠난 그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세 유럽의 귀족들도 영생을 원했습니다. 16-17세기 유럽의 귀족들은 연금술사들에게 돈을 주며 죽지 않는 비법을 연구하라고 했습니다. 현대에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늙지 않고 오래사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의학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사람의 수명이 아주 길어질 것이라고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영생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영생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시간적인 개념’ 의 영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관계적인 개념’의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은 곧,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함을 의미합니다.
전도서 3:11절에, 하나님께서 사람들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영원한 사모하는 마음을 사람들에게 주셔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도록 하셨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은 찾지 않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데만 관심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영생을 영원히 사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자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옥에 가서 사는 것도 영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옥을 영생하는 장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옥은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고 단절된 상태가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영원히 함께 사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영생하시고자 하십니까?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는데, 이 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씁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조건없이 헌신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말 사랑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자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결혼해서 함께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영원히 산다고 하면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셨을 때의 세상은 ‘보시기에 좋아더라’ 라고 감탄이 나올 만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세상은 죄로 인해 좋았던 모습은 사라져가고, 영적인 어둠이 이 세상을 덮었습니다. 죄로 인해 멸망을 받아야 할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도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 멸망받아 마땅한데, 도리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곧 세상은 지금 심판받을 만한 상태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심판을 위해 오지 않으시고, 도리어 구원하고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지독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다가 싫어지면 당장 헤어지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까? 때로 부부에게 이런 짖궂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지금의 아내 나 남편과 결혼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뭐라 답하시겠습니까? 아마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사도바울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로마서 8: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하나님 아버지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기를,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죽이실 정도로 죄인된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탄의 계절을 지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은,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라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정죄치 않고, 죄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셨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19절에,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세상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이 세상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도록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사람들이 어둠을 더 사랑해서 어둠으로 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했는데, 스스로 어둠으로 숨었기에, 여전히 죄의 정죄를 당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빛이신 예수님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그것이 드러날까봐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들이 드러난다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죄가 드러나게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을 수도 있고,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도록, 어둠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어둠속의 죄를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죄인들을 부끄럽게 만들거나 정죄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빛을 통해서 어둠가운데 있는 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어 주셔서, 이제 하나님과 영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죄가 있으면 그 죄가 드러나지 않게 어둠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는 죄가 보이지 않아 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죄의 권세는 그 어둠속에서 더욱 강력하게 사람에게 역사합니다.
성도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내 죄가 드러나서 그 죄로 인해 부끄러움과 정죄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 죄를 숨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죄의 어둠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이 되어 버릴 수도 있음을 지극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으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사탄은 사람의 죄를 가지고 죄지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네 죄가 부끄럽지 않냐? 무슨 얼굴로 가족들과 사람들을 볼 수 있냐? 너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되냐?” 며 정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이십니다. 지은 죄가 있으면 빨리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것을 숨기려고 어둠을 찾아가지 마십시오. 해결함이 없습니다. 죄가 있을 때에는 예수님께 무릎 꿇고 나올 때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예수님은 그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들을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영원히 함께 살고자 하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죄인된 사람과 영원히 사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지은 받은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 시간이 바로 영생의 순간입니다.
오늘도 빛되신 주님과 함께 하심으로, 어둠이 관영한 이 땅에 빛가운데로 걸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성탄에 계절에, 하나님이 죄인된 사람들을 얼마나 관심하시고 사랑하고 계시는데,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거할 수 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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