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Pm-UEh7okHY
새해를 맞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또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먼저 구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내 삶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세상 나라들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고, 주인되신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여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한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고, 한 사람을 중하게 여기게 되면 다른 사람을 경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인은 내가 사랑하고, 중하게 여겨서 섬길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이고, 그리고 그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섬길 수 있는 주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돈을 비롯한 이 세상의 재산, 소유물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재물은 하나님과 견주어 사람들의 주인으로 군림할만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이 많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능력보다, 재물의 능력을 더 과신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구하기 보다는, 재물을 구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며 삽니다. 재물은 원래 사람들의 삶의 편의를 위해서 도구로 만들어졌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재물을 추앙하며, 섬기는 도구로 전락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주인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세상적인 욕심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유익되게 할 만한 것들을 신으로 다 모시고 겸하여, 한꺼번에 섬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기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에는 여러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우상은 바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아스다롯, 몰렉, 다곤과 같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자신들을 풍요롭게 하고,보호해 줄만한 존재라고 하면, 어떤 신인지 상관없이 겸하여 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면서, 하나님과 다른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이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가치없는 우상들과 같이 취급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신이신 하나님이, 사람들이 만든 우상과 같이 취급되는 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십계명 중에 가장 첫번째 계명에 “너는 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 우상들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만이 우리가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유일하신 신,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 하고, 우리가 하나님만을 우리의 주인, 왕으로 섬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께 우리의 염려를 다 맡겨드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세상 염려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염려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시고,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이 있어야 목숨과 몸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의 힘을 빌려서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숨과 몸이 중요한 것과 이를 위해서 너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줄도 아신다. "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을 나는 새를 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 새들은 심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살아있는 것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백합화는 수고도 않고 길쌈도 아니하는데, 솔몬의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은 새와 백합화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너희 하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와 들판의 꽃들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는데,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일일이 모든 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그런데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과 몸을 있게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만을 책임지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재물로 할 수 없는 우리의 영적인 부분까지도 하나님은 돌보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를 믿을 때에, 목숨과 몸을 위해서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주권을 믿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모두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앞으로 있을일까지 미리 당겨서 염려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내일 계약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코비드가 극성이라는데 코비드에 걸리면 어떡하나? 요즘 몸에 컨디션이 안 좋은데 큰 병에 든 것은 아닌가?"
어니 젤렌스킨(Ernie J. Zelinski)이라는 심리학자는 그의 저서 "모르고 사는 즐거움(The Joy of Not Knowing It All" 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걱정하는 것에 대해서 조사한 후,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걱정의 22%는 사소한 고민입니다.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걱정의 4%만이 우리가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의 96%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여기는 4%의 염려는 꼭 필요한가요? 우리는 그 4%의 염려거리도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27: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내일의 일을 걱정하기도 하고, 내일의 일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내일의 일을 아십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앞에 열심히 수고한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때에, 날마다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살아가면서 염려하며 살고 싶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할 것들이 우리를 따라 다닙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염려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빌립보서 4:6절에는 염려할 일이 생겼을 때에 어떻게 해야할지에 관한 바울의 권면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고 합니다. 우리에게 염려가 있을 때에 바울은 하나님께 나아가 아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염려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그 염려거리를 하나님앞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염려할 일이 생겼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오라는 싸인입니다.
요즘 고민상담을 해주는 프로그램들이 여럿있습니다. 상담가들은 다른 사람의 고민을 경청해주고, 그들을 위로하며,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사람들도 고민과 걱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상담가는 우울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를 가장 잘 아시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아뢸 때에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우리의 염려하는 일들이 얼마나 하찮은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시고 경청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염려도 하나님은 관심하고 계시고, 하나님께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염려할 일이 있으십니까? 그 일로 끙끙 앓지 마시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위로와 해결함을 받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가 염려를 하나님께 아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앞으로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미래는 염려의 온상과도 같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염려, 경제적인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염려를 하나님께 아뢸 때에, 우리는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때에 비로서 우리는 염려에서 벗어나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신학교에 다니는 청년에게 사랑하는 처녀가 생겼습니다. 둘은 사귀다가 결혼을 약속하고, 처녀의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먼저 청년이 여자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여자친구의 집은 아주 잘사는 집이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여자 친구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눈짓을 주며, 그 청년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해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처녀의 아버지는 그 청년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물어봅니다.
"자네는 앞으로 뭘 할 작정인가?" "예, 전 신학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가 공부하는 동안 어떻게 살아갈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면 공부하는 동안 내 딸은 어떻게 먹여 살릴건가?"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공부하는 동안 따님은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아버지는 묻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아이를 낳을텐데, 자식들은 누가 키우려고 하나?" 그랬더니 이 청년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키워주실 겁니다.” 그 청년과 대화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편치 않았습니다. 그 청년이 돌아간 후에 여자친구의 어머니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 청년을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애인의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청년은 돈도 없고, 취직해서 가정을 돌볼 계획도 없어 보이더군.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사람은 나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우리의 마음에 염려가 들어오게 되면, 평강을 잃어 버립니다. 마음과 생각이 온통 염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염려거리를 하나님께 맡길 때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보통 평강은, 사람들의 염려가 해결되었을 때에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비록 염려거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그 모든 이해를 넘어 주시는 평강이요, 그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평강을 빼앗아 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염려를 맡아주실 것을 온전히 믿을 때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 잡았던 염려를 물러가고, 평강이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성자인 죠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다. 그러나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염려로 인해 잠식 당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염려를 내어 맡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바른 믿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살다가 보면, 여러가지 염려에 사로 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 버리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쉽습니다.
그럴 때에 하늘 아버지께 오셔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평강으로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나라를 품게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염려가 다가올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 버리지 마시고, 도리어 나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만을 나의 주인이요, 왕으로 확증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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