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WflkNyUKjA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어 하얀 빛과 같이 되고, 그가 입던 옷은 희어져 광채가 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기적의 능력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된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의 사건은 팔일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팔일 전, 가이사라 빌립보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에, 그들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을 듣고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또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복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합니다.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에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제 삼일에 다시 사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지 팔일 후에 예수님은 제자 세 명과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것은 단순히 기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팔일 전 베드로가 고백한 것이 사실임을 그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1. 먼저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가실 때에 혼자 가지 않으시고, 제자 3명과 함께 가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세명은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체 예수님을 따라 산을 오릅니다. 그리고 제자 세명은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기도는 하지 못하고 깊은 졸음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 때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입으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변해서 흰 광채가 나니, 그의 입으신 옷이 희어져 빛이 뿜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몸에서 빛이 나는 영광스런 영적인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니다.
이런 유사한 모습이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4:30절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40일간 있은 후에, 증거의 두판을 들고 내려 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납니다. 이 모습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고, 모세를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기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의 옆에 계신 분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는 모세 스스로 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함으로 하나님의 광채가 그에게 묻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빛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세와 같이, 빛되신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그의 빛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비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빛되신 주님과 친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광채는 예수님이 빛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광채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바뀌신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대표적 인물들익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 그들을 애굽의 종으로부터 구해냄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을 알린 인물입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는데, 예수님은 그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세와 함께 나타난 엘리야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나타날 선지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말라기 4: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였는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엘리야와 같은 존재로,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인물이 세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 세례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존재임을 성경은 말합니다.
누가복음 1:17절에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 천사가 아버지 제사장 스가랴에게 나타나 요한에 대해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세례 요한이 과거 구약시대 때의 엘리야와 같은 존재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엘리야와 함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심으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보는 것이 참으로 대단해 보였을 것입니다. 또한 저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과거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고,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는데,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용모가 변화되심으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빛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둠에 있을 때에 우리의 길을 광명하게 비추시고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과 우리가 동행하며 살아갈 때에, 그 분의 빛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묻어나서, 우리는 빛의 자녀로, 우리의 가정, 교회, 이 사회의 어둠과 죽음을 몰아내는 빛으로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산에서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가 만나는 황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이를 보는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올라 간 세 제자는 피곤했는지 깊은 졸음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갸 이야기하는 소리에 졸음에서 깹니다. 그리고 산위에서 벌어진 말도 안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이 모습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저 같으면 아마 꿈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멍하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고자 할 때에,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비몽사몽인 상태에서도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는 것이 너무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떠나 보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그 황홀한 신비의 현장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인 보통 사람이 가지는 마음일 것입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황홀함의 상태가 사라질가 아쉬워하며 지속하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사람이 여행을 갔다가 어떤 곳에 머물렀는데 풍경도 너무 아름다와,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걱정이 사라지고 평강을 누릴 때에, 보통 사람의 마음에는 그곳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나 기도원과 같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을 하고 은혜를 받게 되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 은혜를 지속해서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적인 경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이심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은혜에 자리에 머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어서 초막셋을 짓고, 그 황홀한 영적인 체험의 자리를 보존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그 마음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 초막을 짓자는 말을 듣지 않으시고, 그 다음 날 산을 내려 가십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말을 무시하고 산에서 내려온 이유를 우스개 소리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초막셋을 짓겠다고 했는데,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모두 어부 출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수이시니, 어차피 예수님께서 초막을 지을 것이고, 이것이 싫으셔서 그냥 산을 내려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초막을 짓기 싫으셔서 베드로의 말에 답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 셋에게 자신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인 것을 보여 주신 이유가 그 산위에 머물면서 영적인 황홀함에 빠져서 살기를 바래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직분은, 세상 사람들과 떨어져서 산위에 머물면서 그의 영광을 누린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영광된 자리를 버리시고, 변화하셔서 사람의 육신의 모습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산위에서 그 용모가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이 보존해야 하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영광된 자리를 벗어내고, 다시 세상으로 가야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영광의 모습을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의 육신의 형상으로 변화하셔서 우리에게로 내려 오셨기에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원하시는 것이, 영적인 신비를 경험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이 산 아래로 내려가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세상과 단절되어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좋은 믿음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또한 세상과 분리되어지고 무관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죄와 사망 가운데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산에서 내려와 그들과 만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세상으로 내려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되심은 영광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확증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했던 내용은 ‘그의 별세 His departure, death’ 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실 때에,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명은 영광된 존재로 남아있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별세를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의 형상으로 오셨고, 끝내 십자가에서 별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 성도인 저와 여러분에게도 ‘별세’ 하라고 하십니다. 영광의 자리를 떠나,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살 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별세에 대해서 두려워하며 이를 거부하기 십상이다.
예수님은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말에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 일이 결코 주께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예수님께 항의하듯이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뭐라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6:23절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런데 안타깝게 베드로는 산위에서도 비슷한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 초막을 짓고 산위에 머무르자며, 예수님의 고난받아 죽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로막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고난과 죽음은 마땅치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메시야되심은 영광의 자리를 보존함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내려와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가 별세할 때에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죽음후에 진정한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예수님과 같이 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3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먼저 부인해야 할 것이 내 자신인 것입니다. 내 자신이 높아지려하고 영광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내려와, 예수님과 같이 별세의 과정을 거친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릴 영광은 산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 위든, 아래든 상관없이 우리가 주님과 같이 동행하면 우리가 어디에 머무르던지 그곳이 영광된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산위에서 영광된 빛의 모습으로 변화하셨고, 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영광된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다시 사람의 형상을 하시고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변화는 산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의 용모를 가지고 오실 때에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은 하늘의 영광을 보존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부정하고,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으심으로 확증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산 위에 천막짓고 세상과 동떨어져서 살지 말고, 예수님과 같이 산에서 내려와 메시야의 사역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나 자신을 부인하며, 예수님처럼 영혼구원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날 예수님은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높아짐을 부인하고, 산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곳이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산에서 내려와 세상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는 주님과 같이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이 세상의 낮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만나며, 주님과 함께 사역하는 진정한 영광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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