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2LtMXhbQR_4
아마 미국에 이민자로 사시는 분들께서 모두 공감하시는 어려움 중에 하나는 언어로 소통하는 것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식료품가게를 하고 계시는 한국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가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척하면서 갑자기 권총을 꺼내 들고 ‘핸즈 업’ 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이 가게 주신이 손은 들지 않고 그 강도에게 말하기를, “No. Hand’s up, we have only 7-Up” 이라고 하더래요.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런 비슷한 일들을 경험해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언어가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에는 사람들이 언어로 인해 고생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1절에 보면,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하는데 어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서로의 말을 너무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말을 서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말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술이 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로 간에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하나님과의 소통에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죄를 짓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큰 죄에 빠지지 않도록 사람들의 말을 어지럽히시고, 사람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말하며 삽니다. 입으로, 문자로, 몸으로 말을 하면서 소통을 합니다. 요즘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동시 통역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과학기술을 통해서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가 올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10장에 보면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가 나옵미다. 그 족보를 보면 노아의 아들 중 함의 자손 니므롯이 시날 땅의 바벨에서 시작되었습니다(창 10:10). 니므롯 자손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게 되고, 거기에서 살게 됩니다. 시날(Shinar)은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땅을 말합니다. 시날 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인류 문명이 발생한 4개의 지역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은 시날땅에 정착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떠한 일들을 했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일은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3절에 “서로 말하되…” 4절에도, “또 말하되….” 그들이 서로 어떠한 말들을 했을까요? “우리가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그리고 돌을 대신하여 벽돌로, 그리고 진흙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말한 대로 벽돌과 역청으로 성읍과 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노아 홍수후의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말로 시작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말에는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그분은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말에도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수준의 말의 능력은 아니지만,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서로의 말에 동의가 되면 그 말한 것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인류최초로 세우고자 했던 것이, 성읍과 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는 모습을 보시고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십니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고 언어도 하나이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했고, 이후로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말을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을 혼잡케 하시니까 서로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탑을 쌓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 함께 살아가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흩어지게 되고, 그들이 건설하려고 했던 도시는 더 이상 건설되지 못하고 그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세우고자 했던 그 도시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도시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성읍과 탑을 세우고자 했는지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일을 위해, 그 도시를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수 많은 도시들이 있습니다. 이 샌안토니오도 큰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말과 일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추구하며 사는 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오고가는 말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화요,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창조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혹시나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안에서 바벨탑을 쌓기 위한 동기를 갖고 수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안에 바벨탑이 있는지를 살피고 이를 무너뜨리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바벨탑은 무엇이겠습니까?
1. 먼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시날에 사람들이 탑을 건설하자고 할 때에,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게 문제가 되냐하면, 그 당시에 하늘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시편 115: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주시고 그곳을 거주하며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사람들이 침범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의 사람들이 탑을 쌓아서 하나님의 영역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노아로부터 하나님께서 내린 홍수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에 순종해야 할텐데, 도리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죄의 성향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저지르게 된 이유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말에 유혹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노아 이후의 사람들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자 하는 것도, 그들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2023년에 상영된 ‘나는 신이다. (In the Name of God: A Holy Betrayual)’ 라는 다큐멘타리를 보면, 신처럼 군림하려고 하는 사이비교주들에 대한 방송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마치 신인 것처럼 행세하며 다른 사람들위에서 왕노릇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류의 과학문명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상상하는 것들을 현실화 시킨 능력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람이 만든 허상이라고 치부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형상과 지능을 닮은 인간로봇을 만들고 사람이 마치 신이라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들이 창조주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가질수록 내가 신격화되어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돈과 과학, 권력을 신으로 여기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같이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가운데 든든하게 세워지기를 소망하며, 전도하는 일을 위해 소통해야 합니다. 바벨탑이 아니라, 예배의 제단, 기도의 제단을 쌓기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며, 그 만난 주님을 간증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2.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읍과 탑을 쌓는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 이름을 내자” 는 목적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은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 (Burj Khalifa, Dubai) 빌딩입니다. 그 높이가 828m입니다. 사람들은 이 건물을 보면서 인류의 위대함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 건물의 이름이 ‘부르즈 할리파’인데 ‘할리파’는 아랍 에미리트(UAE)의 대통령이었던 할리파의 이름이고, ‘부르즈’는 아랍어로 ‘탑’이라는 뜻입니다. 그 탑을 통해서 위대한 사람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이 다른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를 원하시는 분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8:11,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중요한 이유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지 않고 영광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 인해 나라가 망했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그들을 다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셔서, 결국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리라고, 그들에게 기적도 보여주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도 하신 것입니다.
시편 79:9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경험한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이름, 은혜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지난 한 주간 미주 다니엘 기도회가 달라스에서 있었는데 월요일에는 이용훈 찬양선교사님께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현장 기도회에 참석하신 성도님들께서 그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으며 많은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용훈 찬양선교사님은 여러 국제 성악 콩쿨에 입상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을 비롯해서 세계적인 국립극장, 오페라 하우스 등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활동하는 성악가이십니다. 그분은 성악가라는 직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으십니다. 보통 공연을 마친 다음에 가수들은 팬들에게 싸인을 해 주게 마련인데, 이용훈 찬양선교사님은 자신의 이름을 싸인해 달라고 오는 사람에게 이렇게 싸인해 준다고 합니다. “Jesus loves you” 그분은 자신이 가진 재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알기에, 구원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십니다. 여름에는 선교지를 찾아가서 음악회를 열어 선교사님과 교인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하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알리는 일이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Jesus loves you” 라는 싸인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유명한 가수로부터 조롱과 공격을 받기도 하셨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다가 공연에서 해고를 당하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높이는 일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 일은 영적인 공격을 수반하는 일입니다.
이용훈 찬양선교사님처럼, 우리가 높이고 자랑해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 세상에 수 많은 위인들의 이름이 있지만,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능력의 이름, 구원의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를 아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할수 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14 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이름이 욕되게 불리면 속상해 하고, 어떤 분들은 명예고소를 해서 자신의 이름의 명예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나의 이름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귀하게 여기며, 이를 선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일로 서로 대화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에 대해 합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간증하고, 증거하기 위한 대화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전도와 선교하는 일을 위해 이야기 해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바벨탑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흩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탑을 쌓을 때에, 그 탑을 쌓고 온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사는 곳이 도시입니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서로 모여삽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도시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의식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해서 그 도시를 세웠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죄로 인해 홍수로 멸망당할 때,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노아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이고 살아갔어야 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외면함으로 죄가운데서 멸망받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외면하며 살았다가 그러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더욱 더 가까이하는 사회를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바벨탑은 쌓는 이들은 하나님없이 도시를 세우고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으시고 광야의 삶을 주셨습니다. 아마 하나님은 그 생활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제 있다고 흩으시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후원하시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하고, 함께 복음을 전하고, 이 땅에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힘쓰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 이 세상에 어느 도시보다 아름답고 풍요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케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언어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말로 대화하고 소통함으로, 창조의 일을 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의 사람들이 시날땅에 모였을 때에,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도시를 세우고자고 서로 말하고, 그 일을 실행해 옮겼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도시는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뜻하는 바가 하나님의 뜻에 반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세상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도시는,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과 별반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루고, 자신들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자신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 때에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치와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땅에 예배와 기도의 제단을 쌓기를 위해 함께 말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대도시를 만들며 사람이 신인 것처럼 살아가는 도시를 만들고자 할 때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왕이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정과 교회에 세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소망하며, 열심히 하나님과도 대화하고, 성도들끼리도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문제성이 있다고 흩으시는 교회가 아니라, 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꼭 필요한 교회라고 인정받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있는 교회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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