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U__iocmoEa4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드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땅에 깔고, 나귀가 그 위를 지나가도록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주위를 뛰어 다니며 기뻐합니다. 예수님 생애에 최고의 환영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토록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이, 약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9:9절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서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장차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믿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 존경받는 성군입니다. 다윗왕 때에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하였고, 주변 나라들을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의 왕국이 재건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호산나,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외칩니다. ‘호산나’는 ‘오, 구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확신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호산나의 외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유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로마 법정에 넘깁니다. 그리고 총독인 빌라도는 재판 자리에서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막 15:12) 이 때 유대인들이 소리지릅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구원자되심을 거부하고, 그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로마 병정들에게 끌려와서 무기력하게 서있는 예수님을 보며, 예수를 통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치지 않고, '그를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마다 호산나를 외치는 대상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돈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돈을 향해 '호산나' 외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력자를 향해, 어떤 이들은 우상들을 향해,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 호산나 외치며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 주신 유일한 구원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호산나 외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기대하는 방법으로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할지라도, 오로지 구원은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믿고, 예수님께만 호산나 외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호산나 외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나를 구원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기대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끝까지 호산나 외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우리는 공의로우신 예수님께 호산나 외쳐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옳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죄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옳고 그른 것에 상관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심지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을 공의의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곧 돈 있는 사람은 죄가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죄가 있다는 말이다. 똑같은 죄를 짓고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다른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있다고 자신 마음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행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가를 치르는 것이 공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들의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할 속죄 제물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 아들을 대속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결국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과 죽음을 당하셔서, 죄인된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불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공의로우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불의하게 예수님을 취급했습니다. 불의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법정에 세웠습니다. 불의한 군중들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장이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에 순종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죄의 대가를 대신치르기 위해서 그는 죄로 인한 고난을 우리를 위해 몸소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불의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죄됨을 알지 못하고 불의하게 구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래도 죄인된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대신 치러주신 공의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불의 가운데 있다라고 할지라도, 예수님만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을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향해서 끝까지 호산나 외칠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구원의 왕께서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겸손하다고 하더라도 왕이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날, 국왕이나 대통령들은 그들의 높음과 권위에 어울릴 만한 것들을 타고 다닙니다. 어떤 차보다 고급스럽고 안전한 차나 비행기를 탑니다. 전에 대우자동차에서 티코라는 작고 저렴한 경차를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를 대우그룹의 회장이 타고 출근한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에 비하면, 그러한 일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겸손하게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왕의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윗 왕과 같이 강한 권세를 상징하는 백마를 타고, 로마제국의 황제 시저를 제압하고 무찌르는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은 나귀를 타고 나는 겸손한 자라고 말하는 왕이 아니라, 교만할지라도 백마와 병거를 타고 적들을 무찌르는 강한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선지자에게 처음으로 왕을 세워달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이방 나라의 왕들을 동경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강력한 왕이 세워지면, 그 왕이 자신을 대적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강한 권세를 가진 왕이 아니라,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뒤로하시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빌립보서 2:7-8,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죽기까지 사람들을 섬기고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제단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의 낮아지심, 예수님의 비우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지만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자신의 힘을 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은, 앞으로 재림하실 때에 더 이상 나귀를 타고 오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장차 흰말을 타고,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잘것 없는 새끼 나귀를 타시던, 멋진 흰말을 타시던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모양이나 무엇을 타고 오시던지 상관없이,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과 상관없이 예수님만을 향하여 끝까지 호산나를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화평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왔을 때에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공격하려고 논쟁을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싸움을 원치 않으시고, 도리어 화평을 이루고자 오셨습니다.
스가랴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화평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화평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화평케 하기 위한 화평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야의 화평의 시작은 에브라임의 병거를 제거하고,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활을 끊음으로 시작됩니다. 에브라임이나 예루살렘이나 모두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는 화평은 먼저 다른 이들을 공격하는 병거와, 말, 활을 끊고 부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많은 세상의 나라들은 예수님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합니다.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상 나라들을 정복할때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로마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제국을 이루었지만, 그로 인한 눈물과 상처와, 아픔과 죽음이 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화평을 위해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병거와 말과 활을 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군사들에게 잡히실 때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검으로 쳐서 잘랐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천사를 동원할 군사력을 가지셨지만 스스로 무장해제 시키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은 서로가 화평을 도모함으로 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죄의 권세를 향해 칼과 창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분은 자기 스스로를 그 죄의 권세 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럴 때에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평케 하는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무력과 싸움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위해 나의 병거와 말과 활을 끊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이르게 됨을 믿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끝까지 호산나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요, 구세주로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내 기준으로 예수님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다른 존재를 향해 구원해 달라고 호산나 외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백마를 탄 세상의 권력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재물, 그리고 강한 군사력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향해서 호산나 외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소리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속죄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자신을 비워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가지 한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과 대적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전능하심을 부인하고, 평화를 이루어가진 분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여전히 구원해 주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며 겸손하게 살며 평화를 이루어나감으로, 이 땅에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평생에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예수님께만 '호산나' 외치시는 구원의 백성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