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49KmnVqlZiM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의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수치와 고난, 죽음을 당하신 것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지 않으시고, 죽으신지 삼일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권세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다시 살아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을 가지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이 가능하지 않기에 빨리 그 기대를 접고자 노력합니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들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지고 논쟁을 벌입니다. 사람의 부활은 상식적이지 못한 것이고,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지어낸 신화와 같은 허구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죽은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세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기대하며 무덤에 가서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간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썩어 냄새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향품을 발라드리려고 간 것입니다. 그녀들은 비롯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믿기 힘든 부활을 믿는 이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활을 믿던지, 안 믿던지 상관없이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시며 그의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두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그곳에 있는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두 제자의 증언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몸소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도마가 왔을 때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셨고, 자신들이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짜고서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누가 출동하십니까? 예수님이 도마가 있을 때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해 주십니다. 그토록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시고자 애쓰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생명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 주시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출생과 사망 자체가 사람이 주장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부모를 통해서 생명이 잉태되지만 부모조차도 자신이 낳을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아기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에도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장수하며 편히 죽기를 원하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생명을 관장하는 분이 있음을 우리는 삶과 죽음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이 어디로부터 온 것임을 성경 첫부분, 창세기에서부터 알려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흙과 같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그의 아내, 사라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에 사라는 이를 믿지 못하고, 웃음으로 들었습니다. 늙은 여인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믿기지는 않지만 상상만으로도 웃긴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라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고, 그 아이의 이름도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출생뿐만 아니라 죽음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기도 하시고, 또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때로 예외도 두십니다. 엘리야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죽지 않고 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해서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부활이 허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하나님이 주장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사건들입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 한나는 불임하는 여인이었지만, 기도를 통하여 사무엘을 얻은 후에,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사무엘상 2:6)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이 땅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께로 갈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는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생명의 주권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육신적으로 죽는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에 우리는 영원한 천국의 삶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의 주권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대속의 구원자이심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사형도구였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상태로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서 몸에 있는 피가 조금씩 조금씩 빠져 나갑니다. 낮에 더위와 밤에 추위에 고통받으며 죽을 때까지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일주일간 그렇게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는, 예수님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서 속죄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그럴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죽는다고 미리 말씀해 주셨는데, 그들 조차도 이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후입니다. 예수님이 참말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죽었다는 것은 부활을 통해서 증명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셨으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그대로 묻혀 버릴 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열심히 알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사실 대제사장들은 사두개인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만 영과, 천사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겠다고 하실 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거짓으로 꾸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비병들을 고용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하셔서 무덤을 나가신 것입니다. 돌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군인들이 이 사실을 대제사장에게 보고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사실을 숨기려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주며,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말하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커다란 죄입니다.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악한 일입니다. 자신들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절에 예수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하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부활을 확신하며, 이를 증거하는 영혼구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과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가 경험할 부활의 첫열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삶이 죽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며, 이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안에 살아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안에 사니까, 바울은 예수님과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의 성품이 드러나고,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그를 통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내안에 무엇이 살아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집니다. 먹을 것을 보고 탐하며 허겁지겁 먹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네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보다.” 자신은 수고도 안하면서 다른 사람이 수고하여 얻은 것을 탐내는 사람들을 향해 “도둑놈 심보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귀신에 씌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천사와 같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최고의 찬사는 무엇일까요? “네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 같아.” 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지는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내 안에 산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먼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내 과거의 성품이 죽을 때에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인간적인 계획이 죽을 때에 예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옛사람을 죽일 때에 주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죽지 못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실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부활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잘 살기 위해서는 잘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죽을 때에 잘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을 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부활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나는 죽고, 예수로 부활하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증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 아들이시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뿐만 아니라, 주님 재림하실 때에 모두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생의 옷을 입고, 우리 주님을 기쁨으로 반겨 맞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옛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번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오라겨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누가복음 9:23) 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나를 죽이고 십자가를 질 때에,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성도의 부활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기뻐하는 것도 복되지만, 하나님은 성도가 부활의 삶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며, 예수님을 무덤속에 가둬 놓고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로 즐비합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면서, 나를 통하여 이 땅에 예수 부활의 역사를 이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통해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성도된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구원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부활의 새생명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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