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U7WukwLgbv0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소식을 들으며 삽니다. 좋은 소식을 들을 때도 있고, 나쁜 소식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두 소식을 함께 들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결과를 듣기 위해 의사를 찾았는데 그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떤 소식부터 듣고 싶으세요?” 환자는 말했습니다. “나쁜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의사가 말합니다. “당신은 목숨을 건 위험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수술의 성공 확률은 삼분의 일입니다. ” 환자는 낮은 성공확률에 실망하였지만, 뭔가 좋은 일이 있겠지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좋은 소식은 무엇이냐고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의사가 대답힙니다. “지난번 같은 수술을 받으신 두 분이 수술이 잘못되어 죽으셨으니, 이번엔 확률적으로 수술에 성공할 때가 됐습니다”
사람들이 좋은 소식만을 듣기를 원하지만, 꼭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소식을 듣기를 바라는 기대가 클 수록, 내가 원하는 소식을 듣지 못할 때에 실망감도 큽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우리들에게 변함없는, 사람들이 들어야 할 가장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를 전하고자 글을 썼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글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은 희랍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쓰는데, ‘유’는 ‘좋은’, ‘앙겔리온’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마가가 전하는 좋은 소식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마가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죽을 상황에서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고대에 '유앙겔리온'의 대표적인 예는, 승전 소식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은 삶과 죽음이 달린 일입니다. 전쟁에서 지면, 적들에 의해 죽거나 식민지 생활을 했어야 했습니다. 기원전 490년에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 싸움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이겼습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 ’라는 그리스의 용사가 이 기쁜 소식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넓은 마라톤 평원을 지나 아테네에 도착해서, 승전소식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마라톤의 유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기쁜 승전의 소식을 전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전하는 복음도, 예수님께서 죄의 권세를 이기셨고, 사람들이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여러가지 소식들이 전해집니다. 좋은 소식도 있지만, 여러가지 슬프고 나쁜 소식들도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소식들, 이 사회에 일어나는 범죄, 싸움, 그리고 불열의 소식들, 자녀들에게 들려오는 걱정스러운 소식들, 장래에 대한 불안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그러다가 보니, 좋지 못한 세상 소식에 눌려서, 우리가 누려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가장 좋은 소식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우리가 그 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은, 나쁜 소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말하면서, 먼저 세례요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며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신들은 죄인이니 이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말은, 곧 그들이 죄 값으로 인해서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죄로 인해 영원히 죽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보다 절망적인 소식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역설적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나쁜 소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입니다.
세례요한이 그 말을 하기 전에 사람들은 별로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대부분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없이 살거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내가 죄인임을 각성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3:7절에서 세례요한은 천국이 왔어도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 사람들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과 함께 계실 때에, 예수님을 정죄하는 그들을 행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2)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기에, 죄 사함의 은혜를 받지 못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한명도 없습니다.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의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착각할 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했습니다. 사두개인들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직을 비롯해서 성전에서의 중요한 일들은 맡아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지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판결하며 정죄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스스로를 아주 의롭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죄인임을 지적하셨고,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적대시 했습니다.
죄가 만연한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보면, 죄에 대해서 둔감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여기지 못하기에, 그 죄에 대한 해결함을 받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두 여인이 찾아 왔습니다. 한 여인은 자기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또 한 여인은 자기는 일생 이렇다 할 큰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며, 큰 죄를 지었다고 우는 여인을 정죄하듯 바라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두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큰 죄인이라고 통회하는 여인에게는 “당신이 들 수 있는 가장 큰 돌덩어리를 가지고 오시고” 그리고, 일생 이렇다할 큰 죄를 지은 기억이 없다는 사람에게는 “작은 돌멩이를 치마폭에 가득 주워 오시오” 했습니다. 두 여인이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한 여인은 커다란 바윗돌을 낑낑거리며 옮겨 왔고, 다른 여인은 여유있게 새 알 만한 잔 돌을 치마폭 가득 주워왔습니다. 그것을 본 목사는 다시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그 돌멩이들을 가져온 그 자리에 다시 갖다 놓으세요”라고 했습니다. 큰 바윗돌을 가져온 여인은 다시 바윗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하지만 작은 돌들을 가지고 온 여인은 그 돌맹이가 있었던 자리들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거요” 목사가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소소한 죄를 지으면서도, 이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라고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는 것이 정말 복입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때에 회개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대단히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핍박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말 죽을 죄인은 자신이라는 깨달음이 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깨달음이 올 때에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절망을 경험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선하고 의롭다고 너무 과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나에게 죄의 성품이 있음을 늘 기억하며,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누릴 더 복된 자인 줄로 믿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며 주님께로 나아갈 때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소식입니다.
에스겔 18:32절에는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비록 죽을 죄를 지었어도 그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살리고자 하신다는 것이, 죄인에게는 큰 복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음은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모두, 죄로 인해서 죽었다 살아난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절망 속에서 회개할 때에 그 기도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그 가운데 임하게 되고, 기쁨과 감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누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유업으로 물려 받는다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내 삶에 기쁨이 있는지, 없는지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희랍어로 은혜를 '카리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쁨은 '카라'라고 하는데, 은혜와 기쁨은 그 어원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기쁨을 누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기쁨을 잃어 버리고, 삶의 지침과 우울함속에 있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기대하는 좋은 소식들이 많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식이 잘되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내 사업과 계획이 성공적으로 잘되고 있다는 보고를 들으면 참으로 좋습니다. 내가 가고 싶어하는 학교나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합격통지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꼭 내가 듣고 싶어하는 좋은 소식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때로 원치 않는 슬프고 힘든 소식도 듣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권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변함없이 주시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죄가운데 있든, 어리석은 일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을 때에 우리 모두는 죄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 어떤 소식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들려 주십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아주 기분 나쁜 소식을 전해 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아무리 죄없이 살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철저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쁜 소식을 먼저 알려주시는 것은, 나쁜 소식을 완전히 덮어버릴 좋은 소식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일서 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구원받아 깨끗하게 된 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특별히 슬프고 낙망되는 소식을 들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시는 복음을 잊지 말고, 늘 그 은혜와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은 나쁜 소식으로 시작해서 좋은 소식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좋은 소식으로 시작해서 나쁜 소식으로 끝나면 큰 일 납니다.
그리고, 이 좋은 소식을 우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소식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가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향기를 발하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 가운데 있는 이들과 삶의 염려와 죄의 눌림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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