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1/2013 - 성도가 따라가야 할 자취 [베드로전서 2:18-25]
모든 사람들에게는 삶의 자취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삶의 흔적들을 남기고 삽니다.
2006년에
한 청년이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하다가 유행성 출혈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 젊은 의사의 이름은 '안수현'인데
그의 장례식은 그가 다녔던 영락교회에서 치러졌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의사의 죽음이 어떻게 알려 졌는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4천 여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합니다. 그 조문객 중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젊은이가 살았을 때에 남긴 삶의 자취를
기억하며 찾아왔던 것입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아들이 입원한
절망적인 상태에서 만난 젊은 의사가 남긴 진심 어린 위로와 돌봄의 자취를 기억하며 왔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이 젊은 의사가 준 성경책을 받았을 때에 이 청년이 믿는 예수라면 자기도 믿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삶을 살던 한 노인은 그 젊은이로부터 처음 인간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젊은 의사는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죽게 되면 너무 마음 아파하며 장례식까지 찾아가 가족을 위로하고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살았을
때의 자취를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모였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세상 사람들이 살고
간 많은 자취들,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자취를 기억하며 그 뒤를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따라가야 할 자취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자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인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자취를 따라서 따라 살고 있지만, 기독교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자취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닌, 세상에 성공하거나 유명한 사람들, 자신이 존경할 만한 다른 사람의
자취를 따라 살아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람의 자취는 따라갈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치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25절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길을 잃은 양과 같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광야를 헤매다가
맹수에게 잡혀 먹히거나 낭떠러지와 같은 곳에 떨어져 죽게 되는 것이 목자를 잃은 양의 모습입니다. 스스로
제대로 살고자 애쓰고, 다른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지만, 길
잃은 양과 같이 죽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자신도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의 길을 쫓아서 살아가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 8월 8일 부부 싸움 중 자기 아내를 총으로 쏴 살해하고, 피흘려 죽은 아내의 사진을 페이스 북에 올린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주인공은 마이애미에 사는 데렉 메디나(Derek
Medina)입니다. 그가 그렇게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지만, 평소 메디나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마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방범활동도 했고, 책을 써서 문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가 쓴 책 중에서는 "나는 어떻게 대화를 통해서 삶과 결혼 그리고 가족 문제가 있는 사람을 구했는가?"라는 제목의 책도 있었습니다.
다른 가정과 부부의 문제점을
해결하겠다고 책까지 쓰면서 열심을 냈지만, 자기 가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스스로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인도하겠다고 노력을 하지만, 자기 스스로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럴 때에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자취가 있지만 사람의 자취를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자취를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사람들의 진정한 목자요 감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4:6절에서 스스로를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그분이 가신 자취를 따라 갈 때에 진리가 있는 삶이며 또한 영생으로 인도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 길은 우리의 삶에 모범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이 되는 자취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함께
따라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먼저, 예수님은 고난의 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자취 중에 하나는 고난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고난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과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특징은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고난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고난에 참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루기 위하여서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가 아니라 선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난을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20절에
보면,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사람들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불평을 합니다. 착하게 살아보려고 하는데 손해를 보게 되면 억울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선행을 멈추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6:9절에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였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게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19절에는
애매한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때로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사람들은 참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게 보십니다.
요즘 선을 행하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워낙 이것을 이용해서 악한 일들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것이
위축이 되고, 도리어 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각오하고 선을 행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삶의 자취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자취는 복수하지
않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자취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지만 다른 이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삶은 아니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고 고난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자들에 대해서 복수하지 않는 삶을 사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벗어나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복수심일 때가 있습니다.
두 친구가 정글 숲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실수로 늪에 빠졌습니다. 늪에
빠진 친구는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점점 밑으로 가라 앉았습니다. 그것을 보는 친구도 어떻게 구해주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늪에 빠진 친구는 필사적으로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규를 들은 친구는 냉정한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면서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어차피 죽을 것 고통 없이 빨리 죽는 것이 좋지
않겠냐? 네가 두고 간 재산은 내가 가질 테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잘 가게나 친구” 이 말을 들은 늪에 빠진 그 친구는 이곳에서 살아나가서 저 친구에게 반드시
복수해야 겠다는 일념으로 그 늪을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복수심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가 있습니다. 더욱 더 강한 힘을 제공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는
그러한 것이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39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예수님은 자신에게 고난을
주는 자를 도리어 사랑하셨습니다.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앙심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고난을 주고, 욕을 하고, 뺨을 때리는 자들은 내가 담당할 몫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몫입니다.
누군가로 인하여서 고통을
받고 아픔이 있다면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가족이 있습니까? 이웃이 있고, 친구가 있습니까? 그들을
욕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맡겨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욕하고 고난을
주는 사람들에게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였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게 사셨습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다 똑같으셨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죄를 지으라고 유혹하고 시험을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어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죄에 대해서
죽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 역사하지 않도록 십자가 앞에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어야
하지만, 의에 대해서는 살아야 합니다.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선하고 의로웠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비로서 진리와 생명의 길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목자요 감독되신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
잃은 자들의 목자와 감독이 되시는 것이고 성도는 그 발자취를 따라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중고등부에서는 정기적으로 Food Bank 에 가서 자원해서 지역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Food Bank 에 갔다가 왔는데 제 아이가 저를 보자 마자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기를, Food Bank에 도착하니까 칠판에 자기들을 환영하는 글이 적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Welcome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 All of our
individuals and families!" 그리고 그 밑에는 그 헌신에 감사한다는 문구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남겨 놓은 얼마나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남겨 놓은 자취가 있습니다. 늘 깨어서 기도하는 자취, 교회를
청소하며 돌보는 자취, 이웃과 성도들을 사랑하며 돌보는 자취, 고난
중에도 감사하며 기뻐하는 자취,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남기는 자취가 있습니다. 이웃과 직장에서 남기는 자취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남기는 우리 교회에 자취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자취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사는 자취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가
문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지 않고,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자취를 따라가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길을 잃은 양들과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앞서서
모범으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찾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인내하는
자들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복수하는 삶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취를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는 죽으시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와 같아야 합니다.
로마서 16:19절에는 “…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하였습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발견하며 그 자취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길 잃고 죽음의 길로 가는 양과 같은 이들이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진리와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남기신 그 자취가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주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세상에 예수님이 드러나고, 많은 이들이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구원에 길에 동참하는
귀하신 역사가 드러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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