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생각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생활을 통하여서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믿음은
성장합니다. 작은 믿음이 어떠한 사건을
일으키고, 그 사건들을 통하여서 더 큰 믿음에 이르게 되고 점차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마치 징검돌을 건너는 것과 같이 믿음으로 한 돌을 건너고, 한 돌을 건너면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에베소서 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상태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와 죽을 때의 믿음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따라다니는 것만 해도 불안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택했는데 과연 옳은
결정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믿음의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실수가 많았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순교자의 반열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이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해져 나가기를 원하시고,
그 믿음의 사건들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을
통하여서 그 믿음을 더욱 성장케 하였던 것을 봅니다. 우리는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의 사건을 통하여서 어떻게
믿음이 생활로 드러나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믿음을 성장시키시는 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지방에서 배를 타시고 바다 건너편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해변에 도착하셨을 때에 그곳에는 이미 큰 무리가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나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서 간절히 간구합니다. "주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그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땅에는 성전과
회당이 있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고 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회당은 유대인들이 사는 각 지역에 세워졌고 그곳에서는 공중예배와 기도, 신앙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선창자,
기도문 독창부분을 노래하는 사람),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었습니다. 회당장은 회당건물을 관리하고, 예배순서를 작성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일부 재판의 일도 관여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회당장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찾아와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죽을 병에 걸린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는 간절히 간구했던 것입니다. 1.
먼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삶에 위기가 있었을 때에 예수님을
찾음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릴 때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 중에 유독 야이로만이 예수님을 더욱 간절히 만나기 원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위기가 있었고, 그리고 그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문제의 해결자라고 믿었기에 예수님께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야이로의 믿음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으로 죽어가는 딸에게 손을 얹으며 그것으로 아이가 낳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을 찾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삶의 위기 속에서 예수님께로 나아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면 삶의 위기에서 예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 갑니다.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면서 문제를 해결할 만한 말을 구합니다.
재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 다닙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소문난 의사와 변호사들을 찾아서 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다른 어느 곳으로 가기 전에 예수님께로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서 겸손히 주님께 나의 문제를 고하며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을 가늠하기 위한 척도 가운데 하나가 내가 예수님을 찾아서 주님께로 나오냐는 것입니다. 삶의
위기가 있을 때에 먼저 주님을 찾아 나오는 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삶의 위기와 문제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기뻐 만나 주십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람이
성공하고 능력이 있을 때에 사람들을 만나면 환영을 받지만,
실패하여 위기 가운데 있을 때에 사람들을 찾아가면 외면당하고 거절당하기 십상입니다. 서러움을 당합니다. 기껏 반겨주는 곳은 그 위기를 통하여서 좀 이익을 챙길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정반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위기와 문제 가운데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기뻐하시며 반겨 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던지 간에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자를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주님을 믿고서 나아오는 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러 집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야이로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입니다. 혈루병이라고 하면 하혈을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았으니 몸은 허약해 졌습니다. 용한 의원들은 다 만나봤지만 아무
효험이 없고 가진 돈만 날리고, 도리어 그 병이 더욱 위중해 졌다고 했습니다. 병들어 몸이 아픈 것도 힘든데, 사람들은 그 여인을 부정한 여인으로 업신여겼습니다.
그 여인의 상태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옷자락만 만져도 그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오도록 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몰래 옷을 잡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병이 낫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고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이
사건은 야이로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해 주시는 사건입니다.
병들어 죽을 것 같은 그 딸 아이가 병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12년간의 혈루병이 나음을
받았으니, 자신의 딸에게 오셔서 직접 만져 주신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야이로 회당장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세워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역사들을 통하여서 더욱 든든해 집니다.
믿음이 강해집니다. 나도 저러한 믿음의 일들을 경험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신앙에 큰 유익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건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더욱 굳건하게 서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때로 내가 가신 믿음을 깨어 버리실 때가 있습니다. 야이로가
자신의 딸이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 가운데서 있을 때에,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옵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해 주기를
“딸이 죽었으니 어찌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합니다. 병들었던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그 딸이 살았을 때에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열두 해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이 고침을 받은 것은 그녀가 살아있을 때에 일입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딸이 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이지, 이제 죽었으니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토록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고쳐주실 분으로 여겼는데, 그 믿음이 한 순간에 깨어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서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소용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좀 더 지체하지 마시고 내 딸에게 와주셨으면 되셨을 것을 하며 슬퍼했을 것입니다.
열두 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을 붙잡지만 않았어도 내 딸이 살 수 있었을 텐데하면서 그 여인은 원망했을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기대해던 시나리오들이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깨어질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일어나는 일들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당황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병도 고치고,
부유해 지기도 하고, 깨어졌던 가정이 회복되고 삶의 위기와 문제에서 구원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한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절망적인 순간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4.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곧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그 믿음이 깨어졌는데, 역시나 여전히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믿어야할지 모르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믿으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병자를 낫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 이상의 존재임을 믿게 해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을 하셨고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거나 믿을 수 있는 일이 야이로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이로를 더 큰 믿음의 단계로 이끄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야이로의
집에 가니 막 죽은 야이로의 딸로 인해서 우는 통곡함이 있습니다.
훤화하였다고 했는데 시끄럽고 소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하여서
"왜 이러고 있느냐? 이 아이가 잔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비웃고 믿지 못하는 이들을 내어 보내시고,
아이부모, 제자들을 데리고 아이있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적어도 그들은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죽은 열두살의 소녀에게‘달리다굼’하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은 아람어로 탈리타,
소녀야, 쿰, 일어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열두살의 그 아이가 살아서 걸으니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들을 통하여서 야이로를 더 큰 믿음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딸
아이가 살아나는 사건을 통하여서 이제 야이로는 예수님에 대한 또 다른 성숙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이신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은 예수님이 의사 정도의 분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주장하시는 구세주임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더 좋은 믿음은 무엇입니까?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정말로 굉장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찾아오는 믿음도 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더 귀한 믿음은 예수님께서 나의 생명을 죽이게도 하시고 살리게도 하시는 내 생명을 주장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기도 하시고 죽이실 수도 있는 분임을 믿는 믿음으로 성장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낙망과 절망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이제 끝났으니 예수님께 더 이상 나올 필요 없다고 느끼는 일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분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그분이 병을 고치는 의사 정도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빈곤한 자를 부자되게 하실 수 있는 정도의 분이라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을 주장하시며,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두려워 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가운데 믿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달리다쿰” 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죽음 가운데 있던
소녀에게 달리다쿰하셨습니다. 세워주셨습니다. 절망가운데 있던 회당장
야이로에게 달리다쿰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가 잔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대했던 부모와 제자들만이
아이가 죽었다 살아난 그 방에 초대되었고, 믿음의 역사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방에 들어오지 못한 믿음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곳이, 우리의 가정과 우리가 생활하는 곳이, 그 어린 소녀가 일어났던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장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달리다쿰의 응답이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찾아 뵙는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 찾지 말고 먼저 주님께로 오십시오. 다른
이들이 경험한 믿음의 사건들을 경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과 가까이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삶의
주관자임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우리의 삶으로 인해서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드리는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으로 부터 죽음과 절망과 문제 가운데서 달리다쿰의 응답을 받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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