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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떠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때로는 복장이나 생활습관으로 사람들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삭발한 머리에 회색 승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부처를 따르는 승려입니다. 승려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세속의 인연을 끊고 번뇌를 지우겠다는 의지로 머리카락을 삭발합니다.
유대교인들은 키파(Kippah)라고 불리는 작은 모자를 머리에 쓰고 생활합니다. 그리고 먹는 음식도 아무 것이나 먹지 않고, 코셔(Kosher)라고 해서 구약성경에서 먹으라고 허용한 짐승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습니다. 그것도 유대교인의 감독하에, 코셔 인증을 받은 주방기구를 써서, 유대교에서 허락한 방식으로 만든 음식만을 먹습니다. 유대인들은 의복과 먹는 음식을 통해서 자신이 유대교인임을 드러냅니다.
제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에 대학교 수영장에 갔다가 이상한 복장의 여학생을 보았습니다. 보통 여학생들은 수영하기 편하도록 소매가 없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는데, 그 여학생은 팔이 긴 검정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물속에서 긴팔 옷을 입고 수영하는 것도 답답한데, 수영도 초보인지 속도도 제대로 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왜 그런 옷을 입고 수영을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슬람교의 여인들은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히잡’이라는 옷을 입는다고 합니다. 그 여학생도 코란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수영을 하면서도 긴팔의 옷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드러낼 만한 복장이나 특별한 생활습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장이나 외모로 보면, 기독교인인지, 일반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비밀스럽게 숨기면서 살아가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마태복음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임을 세상에 시인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부인한다고 하셨으니,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특별한 복장이나 외모가, 우리의 신앙을 시인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를 깎든지, 얼굴에 점을 찍던지 외적으로 기독교인 것에 대한 표식이 있다면, 내가 기독교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지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지에 대해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은 외적인 복장이나 식생활을 규정함으로 예수님의 제자인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네 제자임을 알 것이다.”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법은 바로 서로 사랑함을 통해서 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이미 세상 사람들도 강조하는 덕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깨달을 때입니다.
사람들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그것이 살아가는데 기쁨이 되고 힘이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님께 선물을 받으면 친구들에게 자랑하면서 자신의 엄마,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만 그런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반지라도 하나 받으면, 조용히 혼자 감상하는 아내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반지를 보여주면서, 얼마나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감사해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시기 전에, 그들이 기억하기를 원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그 어떤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을 깨닫고, 이를 간직하면서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여인이 그 집으로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그 여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 여인은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 여인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했고, 죄인인 그 여인이 그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둔 예수님께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그렇게 한 이유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으로 예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누가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향유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 여인만이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절에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도 여전히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죄로 인해서 죽을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죄사함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를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 기독교인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을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없을 때에,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돌아 보십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 받은 사랑의 감격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으면, 예수님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을 주시면서,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새계명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있었고, 세상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 삽니다.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이, 과거 세상사람들이 행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사랑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은 그 어떤 세상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이요, 새로운 사랑입니다. 우리의 행할 사랑은 세상적인 모범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1) 제자들이 할 사랑은 예수님과 같이 그 사랑의 대상이 제한이 없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할 때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이 제한적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레위기 19:18절에 하나님은 이러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이웃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좀 더 나아간다면 이스라엘과 함께 살고 있는 나그네된 타국인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이웃사랑을 이야기할 때의 대상은 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자신들 이외에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사람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책망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이러한 사랑은 세상에도 많이 있습니다. 증오심을 가지고 수 많은 사람들을 테러하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교안에서 약한 아이들을 놀리고 괴롭히는 ‘불리(Bully)’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아이들끼리는 서로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러한 사랑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제자들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고, 이를 제자들이 행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사랑하는 대상이 많아진다는 것은 행복하고 복된 일입니다. 이 사람도 사랑할 사람, 저 사람도 사랑할 대상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살면 살수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면 그것처럼 슬프고 불행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듯이, 사랑의 대상을 제한두지 않고 사랑할 때에 비로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죄인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사랑받을 만할 수 없는 죄인을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12제자 중에는 마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세리를 죄인과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세리들은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세금을 과하게 부과하여 로마정부에 바칠 것은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취했습니다. 그러한 세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죄인으로부르며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세리 마태를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시고,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사랑받을 의롭고 선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죄인되었을 때에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죄인들에 대해서도 사랑했던 것이 예수님입니다.
때로 우리 주위에 사랑을 하기에는 마땅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세리 마태와 같이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못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볼 때에, 그들은 미움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라고 여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은 그러한 죄인들을 볼 때에,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까를 도전받고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한국, 경산남도 함안군에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손양원목사님,(1902-1950)’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시대를 말기를 사셨던 분입니다. 일제시대 때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1939년에 애양원 교회의 제2대 목사로 애양원의 나병환자들을 섬기셨습니다. 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면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1948년에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때에 반란군들은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이 예수쟁이이고, 그리고 친미파라는 이유로 총살했습니다. 그리고 반란이 진압된 후, 두 아들을 죽인 학생들이 잡혀서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 학생을 죽이지 말라고 탄원합니다.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들을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되게 하겠습니다.”라고 애원합니다. 그래서 손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들을 양자로 삼아서 사랑으로 양육하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시다가 6.25전쟁이 일어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에 공산당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나병환자들과 자신을 죽인 학생에게 보인 사랑은, 사회적인 편견을 뛰어 넘고, 이념을 뛰어넘고, 미움을 뛰어 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그분이야 말로 참다운 예수님의 제자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의 때의 일어날 현상을 말씀하시면서, “그 때에는 서로 미워하겠고...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식어지는 이 사회를 향해서,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 참 사랑을 드러낼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똑똑하다고 알려지는 것을 제자의 모습으로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부자이고 권력이 있다고 그것으로 ‘이 사람은 정말 내 제자’야라고 자랑스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로 제자임을 증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함으로 제자됨을 증명하고, 세상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같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사랑하려는 사람, 심지어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죄인과 원수된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을 당신의 제자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교회 다니는 사람 맞네, 예수님의 제자가 맞네”라고 인정해 줄 때에 예수님은 그 사람을 누구보다 당신의 제자로 자랑스러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서로사랑할 때에 예수님은 이 사람은 나의 참 제자야라고 합니다. 그러한 교회를 향해서 나의 참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사랑하기 힘든 상황이 있을 때에,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합니다.
이 땅에 우리가 사랑할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가 예수님과 같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교회는 정말 예수님의 제자된 교회입니다.’라고 인정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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