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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소위 "산상수훈"이라고 일컬어 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일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산 위로 데리고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심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리에게 가르치신 것들은 세상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대담한 애정행각으로 18세기에 이미 바람둥이로 알려진 카사노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 그 사람에게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참 많을 것입니다. 학창 시절에 보면, 소위 연애박사라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친구들이 모여듭니다. 그 친구의 말들을 들으면 사랑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 때는 그 말이 그렇게 주옥같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만 그럴듯했지 서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서툴던지, 익숙하던지 간에 모두에게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고,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한마디씩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주제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랑에 대한 가르침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먼저 지적하십니다. 너희들은 그 동안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그것이 당시에 일반적인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이웃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18절에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랑할 이웃의 대상도 제한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싫어하는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사랑할 이웃에 대상에서 빼어버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사랑할 이웃은 자신의 민족,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원수는 미워해야 할 대상으로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렇게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세상 사람으로서 지켜야 될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해야 하는 사랑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연애박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의 전문가입니다. 가장 훌륭한 사랑 전문가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기독교인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사랑은 세상과 어떻게 다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법을 따르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 주시는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해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원수와 박해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더 많아 질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들이 멀리 있고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으니까 원수가 되기도 하고, 어려움을 주는 관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텔레비젼 방송국 오락 프로그램에서 시골 할아버지, 할머님들을 모시고 퀴즈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제출된 단어를 보고서, 그 단어를 할머니에게 설명해서 알아 마치는 퀴즈였습니다. 그리고 한 할아버지께서 단어를 받아들었는데, '천생연분'이라는 단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있게 할머니에게 설명하십니다. "여보, 당신하고 나 사이를 뭐라고 하지?" 그랬더니, 할머니께서도 자신있게 대답하십니다. "웬수", 방청석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당황하신 할아버지는 다시 설명합니다. "아니, 그거 말고, 네 글자로..."로 했더니, 할머니께서는 또 자신있게 대답하십니다. "평생 웬수", 그 할머니도 대단하신 분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웬수를 두시고도 평생을 함께 사셨으니 말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원수와 같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미워하고, 복수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받은 대로 대해주는 것이 정당하게 보이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하나님의 아들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사랑의 샘플로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이 누구인지 아십니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아십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똑같이 해를 비춰주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모르시고, 불의한 자를 모르셔서 그들에게도 해와 비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 대상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은 나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인이고, 불의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만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셨다면, 과연 저와 여러분들이 그 대상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자문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때로 의롭고 선한 사람들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악하고 불의한 자들에 대해서는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똑같이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사랑은 그 경계선이 없는 것입니다. 원수와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사랑하고, 도리어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아들, 딸들의 모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 있는데 바로 용서의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과 같이, 십자가에서 몸소 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저주하며 박해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자신들이 하는 죄의 일들을 모른다고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 무지함을 불쌍하게 보셨고,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서 다시 한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께서 자신들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하십니다.

사도행전 7: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박해를 당하는 순간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박해하는 원수와 같은 사람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9-21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 하시느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혼자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남편을 잘 대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일, 아내가 교회에 다녀 온 이후, 남편에게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남편에게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를 쓰고, 남편이 하는 일에 호응하며 열심히 도와주더랍니다. 남편이 너무나 오랜만에 행복함을 느끼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왜 그렇게 태도가 바뀌었는가 하고 궁금해졌습니다. 교회에 다녀와서 그렇게 변했기에, 남편은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남편은 목사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목사님 덕분에 행복해졌습니다. 아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저한테 무척 잘해 줍니다. 혹시 주일 설교의 내용이 무엇이었나요?" 그러자 목사님은 난감해 하면서 대답을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였는데요... "

 

3. 예화이긴 하지만, 아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불화하던 남편을 사랑한 것은 정말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짜로 그러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라고 반문하십니다. 그러니까 원수와 박해하는 자들을 사랑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상을 받을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는 것은, 그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을 잘 해 냈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아십니다. 그러기에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지만, 상을 받지 못할 사랑도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세리와 이방인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리들은 당시에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들과 비교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교하시기를, "그들도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세리들도 하는 상받지 못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방사람들과도 비교하십니다.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이방인들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아는 사람들하고만 인사하고 관계를 갖는다면, 그것은 이방사람의 모습이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자녀임을 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사랑의 영역이 점차 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했던 사람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마음에 불편한 사람을 보면 피하고 외면했는데, 이제는 먼저 가서 반갑게 인사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살아가면 살아갈 수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많아진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잘 되어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나의 사귐의 영역이 줄어들고 있다면,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 점검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시면서까지, 서로 사랑의 영역을 넓혀서 모두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살면 살수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풍성해 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4.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마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본시 온전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불완전하고 한계가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사랑에서 나타나십니다. 요한일서 4:7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내 자신을 헌신하고, 죽일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마치, 예수님께서 불완전하시기에 죽으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약하셔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사랑의 온전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과 원수를 위해서도 죽으실 만큼 온전히 사랑하셨고, 그것은 그분이 온전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온전함을 어디에서 찾으려고 합니까? 나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면서 내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드러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며 그 온전함을 드러내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온전함은 사랑에서 이루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랑,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땅에 세상적인 사랑으로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드러내야 할 사랑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중요한 주제가운데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랑을 소재로 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흔한 주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랑에 대해서 경험하였고, 전문가처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원수가 있고, 박해를 하는 사람들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까운 곳에서 이러한 대상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경험케 하시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되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쉬운 사랑이 아니라, 그 어려운 사랑을 해 냈으니 상급 또한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원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외로워지는 삶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할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기도할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며, 우리 자신 또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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