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6/2017 - 다시 살아나시고: 사도신경(6) [마가복음 16:1-6]
지난 10월에 쓰리랑카에 있는 캔디라는 곳을 선교 차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캔디라는
도시는 과거 싱할라 왕조가 수도로 삼은, 산에 위치한 넓은 호수가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호수가에는 한 절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를 '불치사'라고 부릅니다. 부처의 치아가 보관된 사원이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부처가 죽어서 그의 시신을 화장을 할 때에, 왼쪽 송곳니가 타지
않고 재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치아를 성스럽게 모시고,
그 절을 불치사라고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치아를 성스럽게 여겨서 그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슬람교의
사람들이 꼭 해야 하는 성지순례의 장소가운데 하나가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메디나입니다. 그곳에는 Green Dorm 이 있는데 그곳에는 이슬람을 창시한 모하멧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의 죽은 시체의 일부나 시신을 성스럽게 여기고, 그곳을 방문하여
그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의 죽음의 흔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에,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죽음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부활 생명의 흔적을 남겨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알리던
무덤은 비었고, 도리어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이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날마다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고백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1. 먼저,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제합니다. 죽으셔야
부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다른 사람의 죽음과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의 대가를 치르시기 위한 죽음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진정한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르신 죄의 대가는 단순히
육신적으로 고통받고,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대가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 하늘을 향해서 크게 소리를 지르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영원한 존재의 시간 동안에 가장 괴로웠던 때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그 관계가 단절되었던 십자가 위에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셨어도 그것으로 그토록 괴로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지고, 피를 흘려도 그렇게 괴롭게 울부짖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죄의 대가인 영적인 죽음,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할
때에 그토록 괴로워하셨고 하늘을 향해서 울부짖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로
죽으셔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하나님 계시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무시무시한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셨고, 이제
그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워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단절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여러가지 괴로운 순간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괴롭고, 몸이
좀 아파도 괴롭습니다. 학교 성적이 좋지 못한 것도 괴롭습니다.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그것도 괴롭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괴로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단절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죄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 더욱 힘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언하시면서, 꼭
동시에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죽은지 삼일 후에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던 당시에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말합니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사람들은, 혹시라도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해서 시체를 빼돌리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트려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까봐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사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숨어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죽어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만나러 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썩어 악취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향유를 시체에 부으려고 간 것입니다. 그 여인들은 무덤에 가면서 걱정했던 것도,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는 커다란 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돌을
치워야 죽어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그 말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2. 그런데
그 여인들은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를 만나러 갔다가 뜻 밖의 소식을 듣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그 여인들은,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무덤의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흰옷을 입은 청년을 봅니다. 그리고 그 흰옷 입은 청년이 하는 말을 듣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니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하나님의
천사는 그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립니다.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죽으신 사건으로 그 모든 죄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의
사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의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바로 사탄의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에, 그리고 사탄의 사망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죄의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일 정도로 강력한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댓가를 치르시고, 영원히 죽으셨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졌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도리어
그 죽음의 권세를 끊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23-24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대가를 다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망의 권세아래 두신 것이 아니라, 그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사탄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사망의 권세로 붙잡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사탄의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끊을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며,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 가운데서 이 땅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이
땅에서 역사하는 사망의 권세의 두려움 가운데서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 죽음의 권세를 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셨던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을 믿고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우간다에는 1971년에 대통령이 된 이디 아민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디
아민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대통령 기간 동안 강력한 독재정치를 하면서 자신들의 적대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약 3,000명의 정치인과
군인을 죽였고, 우간다 국민들은 그의 폭적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디 아민 대통령을 '검은 히틀러'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우간다에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키파샘판디라고 하는 목사님도
그의 폭력적인 정권에 반대했기 때문에 대통령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1973년 부활절 아침, 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교회에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죽이려고
총을 들이댔습니다. 그 때에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잠깐 기도할
시간을 주시고, 그 이후에 죽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조용히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죽을 때를 기다리는데, 그를 죽이려던 사람들은 목사님의 그 모습을
보고, "기도해 주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더니 그냥 가버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믿는 사람들은, 가장 두려운 죽음의 위협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의 것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의 영혼을 살려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대가가, 단순이 육신의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임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셔서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로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회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 줄로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러한 예수님을 사망으로부터 다시 살려 주심으로, 어떠한 사탄의 죽음의 권세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생명으로부터 끊을 수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어 놓으려는 사탄의 권세가 강할지라도,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원한 부활생명이 역사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어떠한 권세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으로부터 끊을 수 없을 믿고 확신하며, 어떠한
십자가의 고난의 상황가운데서도 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분의 승리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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