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8/2024 - 당신은 누구의 이웃입니까? [누가복음 10:25-37]
https://youtu.be/SjK_PEA2TiU
사람은 혼자 살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웃이라고 일컬어지는 가까운 관계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이웃에 대한 기억에 있으실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이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집에 일손이 급하게 필요하시면 부모님은 옆집에 가셔서 서슴없이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옆집 분들도 그렇게 했구요. 뭔가 맛있는 것이 있으면 옆에 있는 이웃들과 나눠 먹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받으신 분은 빈그릇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그 그릇에 뭔가를 채워주셨습니다. 멀리 여행을 갈 때에 저희 집에 짐승에게 먹이를 주라고 부탁할 수 있고, 집 열쇠를 맡기고 갈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이웃들이 있어서 든든했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웃 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히브리어 ‘레아’는 “가까이 하다. 어울리다” 라는 어근 ‘라아’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영어의 '이웃' 이라는 단어neighbor도, '가까운'을 뜻하는 ‘neah’ 와 ‘거주인’을 뜻하는 ‘gebur’ 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이라고 하면, 물리적이던 관계적이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가까이에서 서로 의지가되는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러한 이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이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질문의 답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그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의 의도를 아시고 도리어 반문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리고 그 율법학자는 자기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들으시고, "옳게 말하였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의 두번째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 질문도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 바로 답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우리가 함께 읽으신,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미터의 고지대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해수면 아래 250미터의 저지대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길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유대인들이 갈릴리 지역으로 가려고 할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여리고로 통해 난 우회 길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이 다니다가 보니, 그곳에는 강도들이 자주 출현하곤 했습니다.
여리고로 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게 되고, 강도는 그 사람의 옷까지 벗기면서까지 약탈을 하고, 그 사람을 거의 죽은 상태로 버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 뒤로 한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 지나갑니다. 그리고 한 레위인도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어떤 여행하던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를 돌봐 줍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율법학자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율법학자가 질문한 것과는 다른 방향의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학자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에, ‘내가 사랑할 이웃이 누군지를 규정’ 하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상대가 누구인지 상관없이 ‘나는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를 생각하십니까?
1.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명령을 듣는다면, 율법학자와 같이, '내가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일까?" 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사랑할 만한 이웃을 고르게 되겠죠. 그리고 내가 가까이 해야 할 이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하고자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 될 만한 사람들을 열거하십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이 되면 좋을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먼저, 첫번째 이웃 후보자는 강도입니다. 사실, 강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사람 중에 들지는 않지만, 이 사회에 강도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돌이 많은 험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강도들이 자주 출몰했습니다. 강도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길을 가는 사람들을 공격해서 그가 가진 것을 강탈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이 지난 밤에 자신의 아파트 단지 앞 동에서 생긴 일을 흥분하며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밖에 나가보니 경찰차들이 앞에 있는 아파트에 즐비하게 서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 보니 그 동 아파트에 사는 고등학생 아들이 친구와 함께 있다가 총으로 친구를 쏘고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은 평소 부모가 마리화나를 하고, 그 고등학생 아이도 불량하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웃이 저 집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이러한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내 이웃이라고 가까이 하고 싶은 분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이런 위험한 사람들과는 가까이 하지 않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여러분의 이웃으로서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들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먼저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강도만난 사람을 봅니다. 제사장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율법학자는 무척 실망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로서 제사장을 존경했을 것인데, 자신들을 대표해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라고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뒤에 이어 레위인이 그 길을 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 이야기를 듣는 율법학자는 레위인은 뭔가 다르겠지 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레위인도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서 돕지 않고 그냥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강도만난 사람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못본 채하고 그곳을 피하여서 지나갔던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을 더욱 사랑하여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의 일에 그다지 간섭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괜한 문제에 연관되어 힘들어지거나 위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요즘 이러한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올 일이라면 그것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입니다.
2021년 11월 13일에 필라델피아 통근 열차안에서 노숙인 남성이 한 여성이 성폭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열차안에 승객들이 있었지만, 약 8분간이나 여성이 공격당하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부 승객은 그 장면을 휴대전화로 그 장면을 찍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나의 어려움을 방관만 하고 있는 이러한 사람을 내 이웃으로 두고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위험에 빠져서 헤어나올 힘이 없을 때에, 이를 보고 나를 도와 주고 구해줄 이웃을 원할 것입니다.
3. 그리고 이제 마지막 이웃 후보자가 나옵니다.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한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중에 그 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도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이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그냥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상처를 기름과 포도주로 닦아 주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봐주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겠다고 합니다.
아마 이야기를 들으면서 율법학자는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도만난 사람을 잘 돌봐준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극히 천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약시대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원래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고,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수도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게 되는데, 그 이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왕이 앗수르 사람을 북이스라엘 땅에 이주 시키기도 하고,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 지역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사람들과 통혼을 하게 되고,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유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종교적으로도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던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이상한 종교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사마리아사람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린 부정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결코 자신들의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이야기에서는 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돕는 선한 일을 했으니, 참으로 불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마치시고, 율법학자에게 “이 세 사람중에 누가 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었을 때에, 그 율법학자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말해도 될텐데, 굳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 만큼 그는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이라고 말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입을 통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그에게 자비를 베푼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할 때에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의 참된 이웃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의 이웃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선한 사마리아 사란과 같은 이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피부 색깔을 가지지 않으면 내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 삶에 유익이 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나의 이웃이 될 수 없다며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을 나의 이웃이 될 수 없다며 무시하며, 강자들과 어울리며 스스로는 고귀한 사람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내 이웃이 되는지를 관심하기 보다는, 내가 정말 자비를 베푸는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관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서 품은 것이 불쌍한 마음입니다.
오늘날 강도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안에서도 폭력을 당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금 전쟁중에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집이 없어 잘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거리에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이웃이 꼭 필요한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나와 같이 여기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강도만나 쓰러져 죽어가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기를 간절히 원할 것인데, 지금 강도당한 사람도 그를 도와 줄 누군가를 찾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사마리아 사람이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으로서 가장 모범이 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고난 가운데 이들을 보실 때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든 이들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시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마귀라는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우리 모두의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강도만난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예수님은 우리 대신 징계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나음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라, 다른 이들에게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웃이 되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 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모든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아니면 이방인인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구분하며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은 행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자비를 베푼 자라고 말했을 때에, 그에게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강도, 제사장, 레위 사람은 그 강도만난 사람을 자신의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를 해하기도 하고, 별로 신경쓰지 않고 방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고,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십자가 위에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은, 그 어느때보다 이웃으로서의 친밀함을 잃어 버리고, 미움과 분열, 전쟁이 가득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다른 이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깨닫는 다면 이런 일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내 몸과 같이 여기며 이웃들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와 이웃된 이들을 강도로 부터 구해 내고, 그들을 복되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이웃의 삶을 살아가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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