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2/2013 - 수축된 단위의 불길 [열왕기상 18:30-40]
한국의
전쟁사에서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명량 해전은 역사에 길이 남을 싸움입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쳐들어 옴으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97년에 조선수군과 일본 수군이 명량해협에서
싸움이 붙습니다. 일본 수군은 배가 333척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은 겨우 13척의 배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상대로 명랑해협에서 싸움을 벌입니다. 그 싸움에서 일본의 전함을
30여 척을 격파하면서 일본수군을 몰아냅니다. 그 과정 중에서 조선군의 배는 단
한대도 격침되지 않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엘리야 선지자 한 사람이 갈멜산에서 팔백오십의 바알의 제사장들을 이긴 싸움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할 때의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은 이방여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이세벨 섬기던 바알신을 들여와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아합왕이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해서 아합 왕에게 제안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신인지, 아니면 바알이 참신인지를 가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양쪽 모두 갈멜산에 제단을 쌓아 놓고,
그 제단에 불이 내리는 쪽의 신이 참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850명이 갈멜산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대 팔백오십의 영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숫자적으로는 싸운다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 싸움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싸움입니다. 피해야 할 싸움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도리어
그 불리해 보이는 싸움을 겁니다. 왜나하면 엘리야에게는 그들이 몇 명인지, 눈에 보이는 세력이 어떤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오로지 참되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담대하게 그 싸움을 제안했고 그 가운데 섰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성도는 날마다 이러한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 재물 등을 절대적인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것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재물과 권력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의 거짓된 흐름에 대해서 도전장을 내며 나타나는 엘리야와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와 성도입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만이 참 신이시고 의지할 유일한 분이심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엘리야의 모습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우리 성도가 이 세상을 어떠한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볼 것이며, 또한 어떠한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먼저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세상의 거짓된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멜산에는
엘리야와 이방신의 제사장 만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을 갈멜산으로 모이라고 했고, 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신을 증명하는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거대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형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엘리야는 말합니다.
"두 사이에서 언제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던지,
아니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기던지 좇으라"고 했지만 백성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여전히 중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엇이 참신인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를 좇을지를 알지 못하는 세상의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누가 참신인가를 보러 온 것입니다. 아직
이 땅 가운데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참된 것인 줄 알고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양쪽 사이에서 세상을
좇아 살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고 살기도 하는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자신을 이 땅에서 풍요하게 해 줄 수 있는 세상의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 그것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엘리야는
그들의 머뭇거림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결단하지 못하는 그들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에 대해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증인으로 그 갈멜산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엘리야는 참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참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는 자신의 형제자매를 보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는 아무나 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엘리야가 섰고, 또한 그 자리에 저와 여러분들이 서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2. 엘리야는 우상의 사람들과 대적하였고,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냈습니다. 엘리야는
그들과 상대할 때에 위축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엘리야는 자신있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에게 먼저 우선권을 줍니다. “너희가
숫자가 많으니 먼저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택해서 잡은 후에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 갈멜산은 난리가 났습니다.
850명의 제사장들이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잡아서 제물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의 이름을 부르며 불을 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침부터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었는데도 하늘에서는 어떠한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난리를 피웠는데도 어떠한
조짐도 없고 잔잔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더 난리를 칩니다. 단 주위를
돌면서 뛰놀았습니다. 극도로 흥분한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렇게 지치도록
땀 흘리게 뛰어 놀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들의 규례를 따라 칼과 창으로 자신의 몸에서
흐르기까지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피를 흘리면서 자신들을 우상에게 희생하면서까지 바알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바알
제사장 850명이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몸을 상하게
하여 피를 흘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몸과 마음만 지치고 상할 뿐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들에 대해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조롱합니다. “더
큰 소리로 부르라. 너희의 신이 지금 묵상하고 있는지, 아니면 잠간 나갔는지,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수도 있으니까 더 큰 소리로 부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담대하게 그들과 맞섰습니다.
왜냐하면 그 승리는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참신이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괜히 850명이 흥분해서 자신을 해할 수도 있을텐데,
인간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맞섭니다. 이러한
자세가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할 담대함입니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권력과 조직들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살려고 하다 보니 세상적인 염려와 걱정이 앞서서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서 가져야 할 것은 담대함입니다.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살아가는 것을 선포하며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들이 세상에 보여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담대하게 그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엘리야가 그들의 어리석음을 알려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더욱 더
소리를 지르면서 그 응답이 없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언제까지 합니까?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그 일을 하고 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3. 이제 일단 바알이 거짓된 신임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비로서 하나님이 참 신임을 드러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하는 일은 무너진 제단을 다시 수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모든 백성을 향하여 말합니다.
“내게 가까이 오라” 그들이 가까이 와서 모인 곳에는 ‘무너진 여호와의 단’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때에 사용하였던 제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무너져내려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우상에게 드렸기에 여호와의 제단은 다 무너져 내려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을 가까이 오게 하고, 그들 앞에서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합니다. 다시 단을 쌓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노예였던 자신의 조상들을 택하셔서 백성으로 삼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 가운데서도 무너져 버린 여호와의 단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뭔가 새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현혹하는
사탄의 일들에 관심을 합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이 세상의 것으로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들이 많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유럽에서도
하나님의 제단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서 세상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텅비게 되고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사서 극장을 만들고, 박물관을 만들고, 술집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부흥을 주도했던 미국도 제단이 허물어져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공공 장소에서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공립학교와 공공 건물에 세워졌던 십계명들은 철거되어 져서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들을 용납하고, 그것을 합법화 함으로서
하나님의 제단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제단도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가정의 제단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세상의 성공이 가정의 최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돈을 많이
벌어 그 힘으로 어떻게 편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볼까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을 가까이 오게 해서 자신들이 무너뜨린 여호와의 무너진 단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무너져 내린 그 제단을
다시 쌓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곧 이스라엘 12지파를 의미하는 열두 돌을 취하여서 단을 수축하였습니다. 제단은 다른 어떤 것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체가 제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제물이 올려집니다. 엘리야는
그 제단 주위에 도랑을 파서 물을 그 도랑에 가득 채우게 합니다. 그리고 제단 위에도 물을 쏟아 붓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제단에 불이 붙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말합니다.
왜 이렇게 하는지를 말합니다. 36-37절에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그리고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이
때에 여호와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 옵니다.
그리고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웁니다. 그리고 도랑의 물을 핥아 말라버렸습니다.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서 놀라서 그 제단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그리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잡아
기손으로 내려가 거기서 죽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불로 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참신임을 거기에 있는 우상 선지자들과 머뭇거리는 백성들에게 명확하게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그 불의 응답으로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머뭇거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37절에 하늘을 향해서 외쳤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상을 섬기고, 또한 양쪽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오기를 바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리고
이러한 세상의 사람들 사이에 설 수 있는 엘리야와 같은 이들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자신이
서 있는 그곳에 무너진 제단을 쌓고,
일대 팔백오십을 상대로 해서 담대하게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외롭고 두렵지만 하나님 만을 의지하며 영적으로 맞설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와 같은 일을 감당하도록 교회와 성도를 세우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까이 제단 앞에 와야 합니다.
엘리야는 특별히 백성들이 결단할 것을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아올 것을 격려했습니다.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이, 어쩌면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던 그 무너진 제단을 보고 다시
수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하나님께로 향한 제단,
예배를 드리며, 희생을 드리는 삶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늘의 불을 경험해야 합니다.
수축된 그 제단에 불로 상징되는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참신임을 세상에 증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우리의 각 심령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내가 경험하고,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엘리야와 같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허락하신 그 사람들 사이에서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능력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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