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3/2013 -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한 여인 [누가복음 7:36-50]
오늘은
예수님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사랑했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으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조롱하는 사람으로부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어 들어가셔서 앉아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배고픈 것을 면하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식사를 함께 한 다는 것은 좀 더 각별한 관계임을
시사합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함께
식사할 상대에 대해서 특별히 고려를 합니다. 갈라디아서 2:11-12절에는 식사와
관련해서 사도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글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 지역에 갔을 때에 이방인 기독교인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의 대상으로 허락하신 것을 알았기에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는 도중에 당황스러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곧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이 예루살렘에
있는 동료들에게 문제가 될 까봐 그 식사 자리를 떠나서 물러갔던 것입니다. 이 일로 사도바울은 베드로를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해 초대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는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신앙의 외식자, 위선자라고 몰아 붙이셨고, 바리새인들도
이러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초대한 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께나 바리새인에게나 큰 의미가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 집으로 죄인으로 불리는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가더니 눈물을 흘리며 그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온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이 하는 일들을 언찮게 보았습니다.
천한 죄인이니 저런 이상한 일들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죄인인 것을 알 텐데 그 죄인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의 출처를 사랑에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인인 한 여자의 모습과 행동이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야 하는 자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여인만이 죄인이 아니라, 그 곳에 있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도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도 사실
시시때때로 죄를 지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죄 용서함을 받았던 것과 같이 저와 여러분도 동일한 죄용서함과 구원속에서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용서받은 죄인인 이 여인이 예수님에 행한 일들을 보면서, 용서받은 죄인인 저와 여러분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
주님께 나아가야 할지를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죄사함의 은혜를 깨닫는 자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은 것은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는 첫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심각하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짓은 것이 다른 이들에게 발각되었고,
그 이후로 그 동네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 여인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죄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정죄함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게 된 것이지만,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죄를 품고서 자신은 죄인이
아닌 의로운 사람들인 것처럼 서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이 다른 죄인들과 달랐던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그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오기 전에
이미 그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짓누르던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감격속에서 예수님께
눈물을 흘리며, 향유를 부으며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으로부터 죄용서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여인이 사람들에게 보여 준 일들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의미를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47절에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하였습니다. 죽을
죄에서 용서함을 받은 은혜를 깨달을 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이 자신을 사랑하는 행동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20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불릴 만큼 정죄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에게 있어서 자신이 죄인임을 심각하게
깨닫게 된 것 자체가 사실 복입니다. 만약 사람들로부터 '저 여자는
더러운 죄인이다.'라는 조롱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이 지은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숨기고 정당화시키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큰 죄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만큼,
그 큰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이 깨달아지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2. 구체적으로 용서함은 받은 죄인,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죄인된
여인이 바리새인집에 들어간 것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초대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주위의 시선들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그곳에 오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녀를
죄인으로 정죄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그 여인에게 죄인이라는 레이블을 붙였고 정죄하며 사람 취급하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요, 그 여인은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바라보는
것보다 더 예수님께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나를 먼저 사랑해 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날마다 만나고 교제하는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만나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연예를 하게 되면 같이 만나기 위해 다른 일들은 뒤로 제쳐 놓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고 싶어서 결혼을 하게 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자 할 때에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에 대한 사랑이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에 망설이는 마음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나를 구속하신 우리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만나십시오. 3. 그리고 그 사랑은 헌신으로 이어집니다. 헌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값진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것이 헌신입니다. 이
여인이 드린 향유는 값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머리를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닦은 것은 자신의 몸을 헌신하는 일입니다. 다 큰 여인이 자신의 머리를
풀어서 남자의 머리를 닦는다는 것은 아무한테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헌신하는 그 한 분에게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헌신은
값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은 무엇을 드렸던지 간에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바리새인이 이 모습을 보고 못마땅해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예수님을 초대했는데,
갑자기 초점이 여인에게로 갔습니다. 그것도 죄인된 여인입니다. 그것도 상식적이지 못한 보기에 흉하다고 느껴지는 모습이 자기 집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향유를 붓는 것도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을 보시면서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하고 식사 준비를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졌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으로 인해 모멸감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 바리새인을 비교하십니다.
여인은
들어오면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었다. 그리고 내 발에 입맞추고, 향유까지 내게 부었다. 하지만
그 바리새인은 어떠했습니까?
손님으로 초대했으면 적어도 그에 상응한 대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을
내어 발을 씻게 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우입니다.
그리고 입을 맞추며 반기는 것입니다. 또한 귀한 손님인 경우에는 감람유를 머리에
부어서 예의를 표하고 마르기 쉬운 피부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게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죄인이라고 레이블을 붙였지만,
자신이 죄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여전히 죄를 해결받지 못한 죄인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헌신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교회 나온다고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바리새인의 모습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의 용서하심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사랑과 헌신에 대해서 도가 지나친 것은 아니냐며 바리새인과 같은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앞에 드리는 헌신이,
죄를 사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4. 그런데요,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했을 때에 예수님은
그것을 그녀의 믿음과 연결해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구원의 확증을 주신 것입니다. 그
여인이 한 그 행동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여기는 행위였습니다. 자신이 많은 죄가 있지만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으로 감사와 감격속에서 그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헌신의 모습이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 영접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곳에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 곁에 모여있었지만,
구원을 선포받은 자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그 여인 하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죄에서 용서받은 여인이고, 그래서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그래서 자원하여 기쁨으로 헌신한 여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옛날, 미국 개척시대에 양 도둑이
많아 사회의 큰 문젯거리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막아보려고, 정부에서는
양을 도둑질 하다가 잡힌 사람의 이마에 양 도둑(Sheep Thief)이란 뜻으로 S와 T 글자를 낙인시키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양 도둑이 함께 붙잡혔습니다.
법에 따라 그들 두 사람은 이마에 ST가 낙인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인생을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차가운 멸시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아 자포자기하고 "이왕 버린 몸"이라 생각하고
남에게 못할 일만 하다가 폐인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는 이마에 찍힌 불명예를 지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잘못을 용서받겠다는 심정으로 자기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며 성실히 살았습니다.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나자 그 마을 사람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될 시점에는 ST를 낙인의 법도 폐지된지 상당히 오래되어
사람들은 ST의 의미를 잊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너무나 친절한 이 할아버지의 이마에 찍힌 ST라는 글자가 무엇인지 몰라 궁금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ST의 의미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ST는 할아버지와 같이 성자(Saint)와 같은 사람에게 찍어주는
표식이라고 결론을 맺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을 향하여
‘이 여자를 보느냐’ 하였습니다. 네가 업신여기는
그 여인은 너의 모습이고, 그리고 네가 앞으로 되어야 할 너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그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
여자의 모습은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모습은 우리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 죄를 용서함 받은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죄용서함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먼저 사랑해 주신 예수님께로 날마다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헌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최고의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의무가 아닙니다. 기쁨과 자원함으로 주님을 만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앞으로 나올 때에
날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확신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한 여인, 더욱 헌신한 여인으로 날마다 감사와 감격이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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