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2019 - 은혜와 가시 [고린도후서 12:5-10]
교회안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들 중에 ‘은혜’라는 말이 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나 대화를 할 때에도 ‘은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은혜'란 이름을 가진 사람도 꽤 많이 있습니다. ‘은혜’를 정의하자면, 어떤 자격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거저 주는 호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에 은혜는 어떤 사람의 자격 여부에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그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이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한 것도 내가 열심히 수고했기 때문이고, 일이 잘되면 내가 잘될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고 은혜를 알게 되니까, 나에게 주어진 것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내가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도 숨쉴 수 있는 공기나 이 땅을 밝히는 태양과 같은 것들을 보면,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내용입니다. 내가 선하고 열심히 살아서 공기와 태양과 같은 것들이 주어졌다고 말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같은 경우에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은혜를 잘 알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고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그 보상으로 구원을 주시고, 자신을 잘되게 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기에 얼마나 자격이 없는 사람인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을 찾아와 주셔서 만나주시고, 구원에 이르도록 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바울이 어렵고 힘든 고난을 경험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히 바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경험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서,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공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기초합니다.
오늘 말씀 전반부에 보면, 사도바울은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이 주의 환상과 계시를 경험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십사년 전에 세째 하늘에 이끌려서 하늘나라를 경험하였고, 하나님의 여러 계시를 듣고 왔습니다. 그 사람은 영적으로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알고 있다는, 천국을 경험한 사람은 바로 바울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경험했지만, 그것을 마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를 말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의 공격에 대한 답으로 했던 말입니다. 거짓교사들은 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과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진정한 사도임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영적인 신비의 경험을 한 것이 자기가 아닌 것처럼, 객관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자신이 놀라운 영적 경험을 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자신이 어떠한 노력을 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신 전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뭔가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대표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너무 잘 살아서, 그 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반대인 것입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인의 삶을 살아가기에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것을 누리는 사람은, 자신의 공력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은혜를 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에 대해서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신 뜻에 근거한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를 깨달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기에 좋은 은혜를 주시기도 하시지만, 또한 가시를 주시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체험한 은혜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육체에 가시가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역을 할 때에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고 병고친 자도 고쳐주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행 19:12).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자신에게 못 고칠 육체의 가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가진 병을 육체의 가시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아주 괴롭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이 심했던지 그 육신의 가시를 사탄이 주는 고통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는 무엇인지는 확실히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간질병이나 눈병, 아니면 바울을 괴롭히는 사람들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의 가시는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약점이 될만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어떤 의사가 있는데 다른 사람은 잘 고치는데, 정작 자기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고 있으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병은 고쳐주면서, 정작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한다면 이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능력을 주셔서 다른 이들의 병을 잘고치고, 귀신도 쫓아내지만, 자신의 육체의 병은 고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가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를 했으니 대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간곡하게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육체의 가시가 해결되지 않으니 세번씩이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만큼 사도바울은 병을 고침받기 위해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사도바울이,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 자신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그 은혜로 인해서 스스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특별히 다른 이들보다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인기가 많아지고, 많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참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때로 그 은혜로 인해서 사람이 스스로 자고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뭔가 잘해서 그러한 은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하는 일입니다. 은혜를 제대로 경험하게 되면, 자고할 수가 없고, 스스로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해서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높이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경험할 때에 우리는 더욱 낮아져야 하는데, 도리어 그것이 자랑이 되고 교만의 내용이 될 수 있음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해 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깨달아지고, 그것을 감사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은혜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가시까지도 은혜로 받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신의 가시를 놓고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그것이 자신으로 자만치 않기 위해서 임을 깨닫기도 했지만, 그 때에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러한 말씀을 주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육체의 가시속에 고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사탄의 사자로 여길만큼 은혜와 연관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미 은혜가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환상과 계시를 보고, 다른 이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육신을 아프게 하는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자고하지 않고 겸손하도록 하시니,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를 포함하여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게 바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좋은 것들에 대해서는 은혜로 고백하고 감사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주시는 어려움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좋던 싫던지 간에, 은혜로 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 아내가 암에 걸렸을 때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에 계신 어머님과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장모님께서는 16년전에 같은 암에 걸리셔서 같은 고통의 과정을 먼저 경험하셨습니다. 그 때에 어머님께서 제 아내에게 주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암이라도 감사함으로 받아야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주실 때도 은혜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주실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은혜인 것입니다. 자격없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도 하지만, 또한 자격없는 자에게 좋지 못한 것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없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실 은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내 은혜가 네게 족하고, 지금 그 가시도 내가 너에게 주는 은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가시들이 있습니까? 바울과 같이 육체의 가시가 있으십니까? 사람으로 인한 가시가 있으십니까? 가시와 같은 환경들이 있습니까? 때로 그러한 가시로 찔리는 것이 아프고 힘들지만, 그 가시를 통해서 더 값진 것을 이루고자 하심을 깨닫고, 그 가시가 더해져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해짐을 깨닫는다면 ,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완성됨을 깨닫는 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시가 주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그의 약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약한 부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약함 가운데 있게 하심으로, 사도바울이 행하는 능력들이 바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힘으로 다른 이들을 고친다고 한다면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병도 고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병을 그대로 두심으로, 사도 바울이 하는 사역이 바울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하고 있으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또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의지하도록 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 바울안에 늘 경험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하나님 앞에 나의 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연약한 가운데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고통받고, 물질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계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그 삶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게 하시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반대로 많은 것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재능을 주셔서 다른 이들보다 강하고 부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부요하심을 드러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많은 것을 은혜로 받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면서 살아간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드러내지 못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주셨을 때에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깨닫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은혜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나의 능력으로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져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힘으로 살아왔다며 스스로를 자고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져 주시는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때로 육체의 가시와 같이 우리의 삶을 찌르는 가시와 같은 사람도 있고, 환경도 있고, 육신의 아픔도 있겠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받기에 나쁘다고 여기는 것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은혜를 깨닫는 사람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특별히 육체의 가시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말씀으로 살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연약함과 가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약함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케 하는 통로로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고, 특별한 강함과 지혜가 있다고 했을 때에 그것을 자랑함으로 교만해지지 않아야 됩니다. 그 반대로 내가 부족하고 연약함이 있을 때에, 위축되기 보다는, 도리어 그 때에 주님의 강하심을 의지하고 행함으로, 그분의 강하심을 경험하는 복된 삶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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