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1/2024 - 허다한 증인들의 응원 [히브리서 12:1-3]
https://youtu.be/Ee7wqCYLLwI
운동경기에는 제2의 선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관중’입니다. 관중들은 운동장에서 선수들과 같이 뛰지는 않지만,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관중들이 응원해주는 운동경기와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지요. 코로나 팬데믹 때에 무관중으로 치러진 경기를 보면, 경기의 열기가 들합니다. 그런데 관중들이 있으면 경기가 살아납니다. 저희 아이둘은 중학교에서 농구를 했습니다. 중학생들이니 그들의 농구 실력은 프로농구 경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형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경기할 때에 분위기는 정말로 뜨겁습니다. 그들을 응원하는 학부모들이 있기 때문입니다.특별히 자기 자녀가 볼을 잡으면 부모들은 흥분해서 일어나 응원을 합니다. 그러다가 볼을 넣지 못하면 같은 팀의 부모들이 너무 아쉬워합니다. 그리고 상대팀에서 파울이라도 하면 어떤 한 부모님은 일어나서 큰 소리로 항의를 합니다. 이러한 관중들이 있는 것이 선수들에게는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허다한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것은, 그 증인 모두는 우리를 응원한 같은 편인 것입니다.
그 증인들이 누구인지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벨을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이 열거되어져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 라합, 다윗, 그리고 열거되지 않은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먼저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의 경주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이제는 우리의 증인이 되어서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응원단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면, 믿음의 경주를 마친 선진들의 응원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보고 있는 허다한 증인들이 어떻게 응원하고 있는지, 그 소리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에게 '벗어 버려" 라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들의 복장을 보면 어떻습니까? 복장들이 가볍고 단순합니다. 운동화도 달리기에 도움이 되는 운동화를 신습니다. 그리고 달리기 선수들의 몸은 어떻습니까? 군살이 없이 아주 날씬합니다. 달리기 선수들은 모든 무거운 것과 거추장스러운 것을 다 벗어 버리고 가벼운 몸으로 경주를 치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도 벗어 버릴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먼저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몸이 살이 쪄서 무거우면 쉽게 지치고, 경주를 끝까지 하기가 힘듭니다. 영적으로 우리를 무겁게 만드는 무거운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세상적인 탐욕의 것으로 채우게 되면 믿음의 경주를 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것에 집착해서 살아간다면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이후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부르시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그물뿐만 아니라 같이 그물을 깁던 아버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내 가족, 삶에ㅡ대한 염려와 문제, 내가 쌓아둔 세상의 공적, 물질들이 믿음의 경주에 너무 무거운 짐이라면 이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움켜 쥐고는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응원하는 증인들은 지금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것 붙잡고 있다가는 경주를 하지 못한다고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경주할 때에 우리를 붙잡고 늘어지고, 방해하는 것들이 있으면 경주가 힘들고 지치게 됩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를 얽매어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얽매고자 하는 죄를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얽매이기 쉽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환각 약물이나 쾌락적인 습관에 중독이 되면 끊기도 힘들고, 설령 끊었다고 할지라도 다시 그 일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것이 죄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죄의 생각들과 믿음에 좋지 못한 습관들, 우리의 믿음에 저해를 가져 오는 모든 것들이 있으면 날마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 달리기를 하는데,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몸에는 치렁치렁 장신구들을 하고, 땅에 끌리는 옷을 입고서 경기에 임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겠습니까?
바다에서 사는 따개비라는 갑각류의 해양동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따개비들이 돌이나 거북이와 같은 것에 붙어사는데, 거북이에게 다닥다닥 붙어서 몸을 감싸면, 거북이가 활동하는데 아주 불편합니다. 이것을 벗어 버려야 하는데 거북이는 스스로 그 따개비를 제거할 수 없으니 그것이 더 달라붙고, 점점 그 무게에 눌려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것들, 죄의 것들을 벗어 버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세상의 짐들, 죄의 무게들을 덜어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믿음의 경주를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거운 것을 지고, 죄에 얽매여서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답답해 하며 이렇게 고함칠 것입니다.
"나도 무거운 것을 지고, 죄에 얽매여 달려 본 적이 있었어. 그런데 그것을 벗어 버리니 너무 편하고 좋더라. 그러니 아까워하거나 아쉬워하지 말고 벗어버려!"
우리를 누르고 얽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믿음의 선조들이 누렸던 편안함과 자유함을 누리는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그리고 우리의 증인들은 우리들에게 예수를 바라보라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달기리 경주의 특징은 정확한 목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빠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목표지점을 향해 뛰지 않으면 경기를 완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시선을 결승전을 바라보면서 뛰어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도 바라보아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증인들은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십니다.
2절에 보면, 우리가 바라봐야 할 예수님이 경험하신 믿음의 경주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사,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예수님만을 줄 곳 바라봐야 하는 경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바라보지 않게 되면, 그 믿음은 그 믿음에서 탈선하게 되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절망과 혼돈에 빠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밤에, 바다를 걸어서 배를 타고가는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이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두려워하는데,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만일 당신이 예수님이시라면, 나를 바다 위로 걷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다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곧 베드로가 물에 빠집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며 바다를 걷던 베드로가, 바람에 시선을 빼앗길 때에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빼앗길 떄가 있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를 보내서 우리로 그것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우리로 유혹적인 것들을 보내서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을 빼앗은 것이 있을 때에, 이를 의식하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떄에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의 눈은 우리가 관심하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대학교에 한 남학생이 수업을 받는데, 그 교실에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에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친구에게, 그 여학생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며 마냥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그 여학생이 수업시간에 자신을 13번이나 흘깃하며 쳐다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남학생이 그 여학생을 계속 봤으니, 그 여학생이 자기를 본 것을 알아봤겠지요. 그리고 그 여학생은 그 남학생을 좋아서 본 것이 아니라, 왠 남자가 자꾸 자기를 쳐다보니까 부담이 되어서 쳐다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싫어하는 사림이 있는데 얼굴을 보기 싫어서 뒷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별 소용이 없더래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뒤통수가 보여서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이 싫으면 현관에 놓인 신발도 보기 싫어서 발로 밟고, 뻥 차버린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할 때에 보지 말라고 해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빼앗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럴 때에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함으로 바라보며, 주님이 가신 믿음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도는 늘 그 시선을 주님께 향하고, 그분께로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증인된 선조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소리지를 것입니다. “다른 것에 한 눈 팔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세요! 안 그러면 길 잃어 버려요”
3.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은 우리로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으라"고 응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에,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참으로 피곤하고 낙심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얼마나 많은 대적들이 예수님을 방해했습니까? 예수님을 방해하고 비방하려고 함정을 놓고,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죄인들이 예수님께 거역한 일을 참으셨습니다. 믿음의 선조는 자신을 거스르는 죄인이 나타날 때에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이를 참을 때에 우리의 경주가 한결 쉬워집니다.
우리가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우리의 생각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대적자를 계속 생각하게 되니 피곤하고 낙심이 됩니다. 그 때에 우리를 피곤하고 낙심케 하는 대적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거스르던 죄인들을 인내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지치지 않고 소망가운데 경주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시던는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칼을 빼어 공격하다가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 땅에 떨어뜨립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떨어진 말고의 귀를 주어 치료해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예수님꼐서 능력이 없으셔서 사람들에게 결박당하시고, 매맞으시고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의 지배를 받는 그들을 향해서, 선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악으로 예수님을 상대하는 자들을 선으로 이긴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우리가 경주중에 우리를 거스르는 사람으로 인해서 피곤하고 낙심할 때에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예수님은 죄인들이 거역할 때에 이를 참으셨어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했더니, 그 경주를 완주할 수 있었어요"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의 응원을 받는 경기를 치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기 전에, 이미 그 경주를 완주한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진들은,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무거운 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벗어나 방황할 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대적자들로 인해 피곤하고 낙심될 때에, 죄인들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들로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주님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님이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그는 어디를 바라봅니까? 사도행전 7: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질 때에, 어떻게 돌을 피할까 돌을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쳐다 보며 증오했던 것도 아니고, 피투성이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한탄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 고난의 상황을 인내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하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주목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스데반 집사님은 두 가지를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스데반 집사님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보시면서 응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늘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 그리고 우리를 응원하는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시며, 더욱 확신가운데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