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2020 - 원수를 이기는 사랑을 하라 [누가복음 6:27-36]
세상을 보면서 참 아이러니 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사랑을 최고의 가치라고 말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사랑함으로 일어나는 일들도 많이 있지만, 사랑이 없어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이 더욱 많아 보입니다. 이 세상이 사랑에 의해서 지배받기 보다는, 미움과 무관심의 힘이 사랑의 힘을 능가하여 지배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할 일만 있으면 좋을텐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사람들과 부딪쳐서 상처를 받을 때도 있고, 그로 인해 미움과 적대적인 감정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미움의 감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미움과 적대적인 감정에 사로 잡힌 사람과 사회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것은 곧 자신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미움과 적대감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 향하여 미움에 사로 잡히지 말고, 참된 사랑을 할 것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원수됨과 미움, 저주와 모욕을 이기는 사랑을 하고 선대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특징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그러기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될 뿐아니라, 그 사랑을 외부로 발산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살펴 보면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랑의 모습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리 안에 있는 미움과 갈등의 관계가 해결되고, 사랑으로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관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행동의 동기가 사랑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2:35절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서 와서 시험하고자 말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예수님께서는 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야 하는 수 백개의 율법이 있지만, 그 모든 율법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의 완성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율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모든 행위가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행함의 기초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행동들이 율법을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하지 말라고 하는 일들을 굳이 하심으로 안식일 계명을 어기십니다. 죄지은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여인을 용서해 줍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어서 함께 먹고 마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행해질 때에 완전하게 되어짐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일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셨고,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온전한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가정을 경영하고, 사회에서 일하고 사람들을 도우며 삽니다. 사람들과 선한 관계를 맺기에 힘을 씁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의 행위가 온전하게 되는 것은, 그 모든 일을 할 때에 사랑에 기초해서 할 때입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원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주도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상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원수 취급하던, 미워하던, 저주하던, 모욕하던 것과 상관없이 그들을 사랑으로 대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사랑이나 선대를 할 때에,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반응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해야 할 행동을 정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나를 미워하고 악하게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대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상관없이 주도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6:31절은,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의 뜻은, 사랑과 선대는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 남을 대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마치 나를 대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에 보면, 하나님은 원수나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 대해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법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만일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 잃은 것을 보면 못 본체하지 말고, 그 원수된 사람에게 짐승을 돌려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진 것을 보거든, 그냥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나를 원수취급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짐승을 잃어 버리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에 이를 외면하고, 그것 잘됐다고 은근히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때에 그 원수의 어려움을 못본체 하지 말고, 그 때에 그 사람을 도우며 선대하며 사랑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원수를 갚아주셨다고 볼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은 길잃어버린 원수의 짐승을 보거나, 원수의 나귀가 넘어지며 도와 주지 말고 못 본체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과 원수된 자가 어려움에 있을 때에, 그 사람을 선대함으로, 그 사람과의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는 때로 활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미워하고 저주하는 관계로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주도적으로 사랑함으로 이러한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주고 받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때로 사랑을 주지만 그 사랑이 준 만큼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사랑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할 때에 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하게 되면 그 사랑은 온전하지도 않고 오래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사랑은 “주고 받고”하는 것이 아니라, “돌려 받지 못해도, 주고 주고 또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능동적이었고 주도적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예수님의 사랑을 왜곡하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악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사람들을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그냥 주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전하시기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마다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사랑이 없어 보이는 악명 높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가족이나 친구들과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사랑의 공동체가 있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그 사랑의 공동체가, 공동체 밖의 사람들은 외면하며, 심지어 적대적인 입장을 가진다면, 그들의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그러한 성향이 있었습니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했을 때에, 그 이웃의 범위는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자기 동족이나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이웃이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이웃의 범주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배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만을 사랑하고, 다른 외부 사람들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을 외치지만 편협한 사랑으로 인해서, 도리어 외부의 사람들에 대해서 미워하고 대적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랑의 힘이, 외부를 향해서는 미움과 증오의 힘으로 발산됩니다.
인종차별, 계층간의 차별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다른 인종과 계층에 대해서 증오하고 차별하는 이들은, 반대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는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다른 공동체에 대한 차별과 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국가 사이에 외교적인 갈등이 일어났을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더욱 커집니다. 그런데 반면에 내 나라에 대한 애국심은, 다른 나라에 대한 미움과 적대심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나와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이웃이라고 해서 사랑하고,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외부인이라고 해서 적대시하며 미워한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열심히 사랑하게는데나의 사랑으로 인해 세상은 미움과 갈등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내가 속한 공동체를 넘어, 나와 다른 영역속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속한 사랑의 경계선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경계선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정죄하며 미워했던 세리와 죄인들의 영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친구로 삼으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시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두셨고, 그 모든 이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따르는 자들은, 사랑도 예수님과 같이 해야 합니다. 나를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들까지도 품을 수 있도록 사랑의 경계선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내가 속한 공동체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확대 될 때에, 사랑이 미움을 이기는,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이 이 땅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을 할 때에 주어지는 최고의 영애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는데,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증명되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대단한 기적과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랑으로 증명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이들을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를 저주하고 모욕하는 자들을 향해서 축복하셔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입증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길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묘사하시기를,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인자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깨닫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은혜를 베푸셨고,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심으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4: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일컬어 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대하든지 간에 사랑으로 대하셨기에,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이 확증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더욱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된 것을, 나를 미워하고 원수로 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해 보이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에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이 세상이 사랑으로 행복해 하기보다는, 사회에 만연한 미움과 갈등으로 두려워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방식은 이 땅에 있는 미움과 갈등을 이기기에는 너무 허약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보다 적극적이고 성숙한 사랑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이 요청하시는 사랑은, ‘주고 받는 것’는 것을 기대하며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주도적으로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고 미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의 지경이 늘 넓혀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랑이, 외부 사람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사랑이, 외부사람들에게도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흘러가게 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차별과 미움으로 인한 상처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런데 미움을 이기고, 이 땅을 치유하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미움과 대적함이 만연한 이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행함으로, 이 세상을 치유하고, 우리가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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