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5/2020 - 호산나 외침을 멈추지 말라 [스가랴 9:9-10]
오늘 설교는 동시통역으로 진행됩니다. 영어 회중 분들은 그 동안 통역을 통해 영어로 설교를 들으셨었는데, 온라인 예배로 드리게 되면서 그렇게 되지 못함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동시 통역이 한국어 회중이나, 영어회중이나 모두에게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서로의 형편을 이해하고, 하나님 말씀에 더욱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을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했던 일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유월절이 시작되기 며칠 전,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열렬히 환영합니다. 자신이 입은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주변에 있는 종려나무의 가지를 꺽어서 흔들면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합니다.
‘호산나’는 ‘오 구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분으로 확신하며 환영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 약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올 왕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성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스가랴가 예언한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 드디어 왔다는 확신과 기대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도 그들이 그러한 기대를 가지기에 충분한 때였습니다. 그 때는 유월절을 준비하는 때였습니다. 유월절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시대 떄에 애굽 바로왕에게 430년 동안 종노릇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주셨고, 그 구원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것이 유월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때와 비슷한 형편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황제의 통치를 받으면서 여러 학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제2의 유월절을 기대하고 있었을텐데, 스가랴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오셨으니 예루살렘 성에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그 환영하고 기뻐하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마냥 기뻐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호산나 외침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리는 시작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열렬한 환호를 받지만, 결국 이 사람들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선동되어 결국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것도 잘 아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은 며칠이 못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외치는 사람들로 돌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환영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예수님께 등을 돌린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기대하던 메시야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며 살아가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구원의 왕으로 믿고 살아가기 힘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왕에 대한 생각, 구원의 방법에 대한 생각을 바꿀 때에 예수님이 나의 왕이요, 구원자되심을 믿고, 지속적으로 ‘호산나’를 외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스가랴 9장의 말씀은 구원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떠한 모습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스가랴는 예수님이 공의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의로우셨기에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과 성전에서 아이들이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소리지르는 모습에 도리어 화가 났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공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불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지속적으로 어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다른 날을 놔두고 꼭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안식일 법을 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와 같이 지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는 죄인들을 향하여 자신이 죄를 용서한다며 마치 하나님이 되는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또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과 동일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억울한 것은 예수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신들을 향해서 도리어 불의한 자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공의롭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불의하고 위험한 사람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예수님이 불의한 자가 아니라 공의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불법을 행하는 불의한 자로 보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5: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했을 때 율법의 본질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샅이 사랑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 기초에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외형적로는 잘 지켜 의롭게 보였지만, 그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정죄의 마음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의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신 공의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신 것도 예수님의 공의를 드러내십니다. 사람의 죄는 그 댓가를 누군가 치를 때에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사람들이 지어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죄의 댓가를 치르시고 공의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의로우심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른 줄로 믿습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시고, 예수님의 겸손이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의 새끼를 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오신 것은 예수님이 겸손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스스로를 제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고, 극기야는 대속물로 자신을 사람에게 주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함으로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을 점차 싫어했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을 때에, 예수님이 다윗왕의 자손으로서 자신들을 구속한 왕으로 믿고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그들앞에 나타났을 때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법정앞에서 무기력 하게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하기에, 지금껏 나귀를 타셨으면 이제는 군마로 갈아타셔야 하는데 여전히 나귀를 타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후손답게,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기대하며, 그렇게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을 했는데, 로마에 의해 결박당하여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나귀타고 들어온다고 그를 메시야로 생각했던 자신들이 어리석었고, 예수에게 속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호산나를 외쳤던 자신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끼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렇게 열렬히 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겸손이 없으셨고,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철저하게 낮아지는 겸손이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의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낮아지시고 겸손하신 구세주를 원치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한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은 화평의 왕이시고, 예수님이 만드신 화평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가랴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메시야가 이루고자 원하시는 화평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화평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화평케 하기 위한 화평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화평의 시작은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은 전체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구원의 왕은, 에브라임의 병거,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활도 끊는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강력했던 병거를 비롯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력을 끊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보통 왕같으면 화평을 만들기 위해,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그 군사력을 무산시킬 텐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무장을 먼저 해제시키십니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화평을 이루는 것은 무기와 같은 군사력이나 공격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병거와 말, 화살들을 꺾고 부술 때에 비로서 화평의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은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억압과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정권이 바다에서부터 바다에까지, 유다브라데강에서 땅끝까지 이른다고 하셨는데, 모든 이들이 화평가운데 구속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군사들에게 잡히실 때에, 베드로가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천사를 동원할 군사력을 가지셨지만 스스로 무장해제 시키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은 서로가 화평을 도모함으로 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죄로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과 화평하고자 하셨기에, 우리는 죄가운데서도 용서함 받고 구원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메시야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분이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한 구세주로 모시기 힘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은 다른 이들과의 화평을 위해서 내가 가진 공격력을 제거하고, 화평을 전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땅에 유능한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의 사람들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 없고, 또한 죄로 인한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왕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의 주님을 보면서 무기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공의를 이루시는 주님을 보면서 우리는 답답해 할 수도 있습니다. 적의 병기가 아니라 나의 활과 병거를 부수시는 화평의 주님이 이해가 안될 때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호산나라고 외쳤던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였을 때, 그들의 더 이상 호산나라고 외치지 않고,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와 겸손과 화평이 우리를 구원하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재판장에 무기력하게 서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서 여전히 주님만이 내 구세주입니다라고 외치는 믿음입니다. 내가 가진 건강과 물질, 풍요를 허무신다고 할지라도 그분을 향해 호산나 외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면서 “당신이나 구원하시오” 가 아니라, “여전히 당신은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라고 외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주님께서 받으신 모든 연약함과 고난과 수치는 그분이 구세주가 아니라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길 위해 당하신 것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구원이 더디고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는 주님임을 믿고, 끝까지 호산나를 외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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