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9/2021 -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고린도전서 13:1-4] - 어버이주일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님을 생각할 때 어떤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2018년 어버이날에 대전지역 5개 대학에서 500명의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부모님을 연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이 사랑(28.2%), 그리고 희생(23.5%)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학생은 67.3%, 그리고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핸드폰이나 지갑에 있다고 답한 사람은 70.82%라고 합니다.
때로 자녀들 가운데 부모님들로부터 학대를 받아 부모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아픔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을 생각할 때에 사랑과 헌신에 대해서 연상한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고, 부모는 가장 헌신적인 사랑의 모범이 되시는 분임에 분명합니다.
부모를 생각할 때에 사랑과 헌신을 떠올리는 것은, 그분들이 자녀들에게 헌신을 통하여서 사랑의 모습을 행함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 중에 자녀에게 말로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자녀들을 향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녀들은 그들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에 관한 글을 읽다가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랑은 마음에 가지고 있는 추상적인 명사,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할 동사인 것입니다.
오늘 읽으신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도 무엇이 사랑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4절부터는 사랑의 구체적인 특성이나 행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모습은 우리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사랑이 자녀들을 위한 사랑에 국한되어 있지만, 이러한 사랑을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특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보편적인 사람들, 죄인들까지도 모두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모범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사랑에 대해서 편지를 쓴 것은 그 교회에 사랑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사랑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와 능력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2장에 그 교회에 있는 은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 예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등의 영적인 은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무질서와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은사가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의 은사를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영적으로 문란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는 바울은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이에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너희들이 대단하다고 주장하는 방언과 예언, 믿음, 구제와 헌신의 행위들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은사들은 사랑으로 사용되어질 때에 그것이 유익이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상기하며, 우리의 사랑의 모습을 성찰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구체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바울은 사랑은 오래참는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의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참는다고 한다면, 화가 나는 일이 있는데 그 분노를 오랫동안 품고 참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화를 오래참으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음은 분을 품고 오래 참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잘못된 일을 보았을 때에 그 사람을 품고, 그 사람이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참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은 예수님의 성품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성경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03:8절에,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라는 문구는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할 때에 자주 나오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라는 문구와 함께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것은 사람들에게 노하실 일이 없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노하셔야 하는 일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이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참으시며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3:9절에 베드로는 왜 주께서 재림까지 연기하실 정도로 사람들의 죄악을 오래참으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사랑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무지함과 미숙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죄를 지었을 때에 당장 정죄하시고 징계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사랑으로 사람들을 지도하시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참습니다. 부모님을 통해서도 오래참으시는 부모님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물 중에서 성숙한 객체가 되기 위해 가장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동물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반 동물들은 태어난 다음에 스스로 엄마 젖을 찾아 빨고, 며칠 있다가 일어서서 달리기도 하는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성인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 시간들을 사랑으로 참고 기다립니다. 아이가 밥을 먹지 못하고 젖만 먹는다고 야단치지 않습니다. 아이가 빨리 걷지 못한다고 기는 아이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도리어 참고 기다리시며 아이가 스스로 밥 한 숟가락을 뜨고, 서서 한 발을 내 디딜때에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연약하고 미숙할 때에 자녀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시고, 그들이 성장하도록 사랑으로 오래참고 기다려 주십니다.
사람이 성인이 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완전히 성숙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하고 실수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때 사랑은 우리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연약함과 미숙함을 이해하며, 잘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참고 기다리도록 합니다.
우리 가족이나 교우, 이웃들에게서 미숙하고 잘못하는 모습이 있다라고 한다면, 그 일로 인해서 시험들지 마시고 오래 참으시며 그 사람의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도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나에게 맡기셨던 것처럼, 상대방의 신앙성장에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나를 택하셔서 맡기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사랑은 온유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온유하게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거칠거나 폭력적으로 대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 온유하지 못한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권력으로 약자들을 거칠게 다루는 일들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과 인종과 문화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온유합니다. 그것도 상대방을 봐가면서 온유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온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자신으로 부터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배울 때에,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이를 사랑함으로 온유하게 대할 때에, 상대방을 사랑하는 행위도 되지만, 또한 내 마음이 안식을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온유와 겸손으로 대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 마음에 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유와 겸손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은, 온유와 겸손이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온유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이 낮추는 겸손함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자신은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섬김의 자세가 있을 때에 상대방에게 온유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권력이 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겸손하게 할 때에 다른 이들에게 온유함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온유하면 그 사랑이 더 커보입니다.
민수기 12:3절에 보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형인 아론과 누나인 미리암과 함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가나안으로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론과 미리암이 동생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따지기를 “여호와께서 너에게만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셨다.” 라고 하면서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모세는 그들에게 성을 내며 그들과 다투지 않고 온유함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시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가 모세에게 있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온유함은 내가 가진 힘으로 상대방에게 성을 내며 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 힘을 잘 통제하여 온유함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37:11절에,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 마음이 쉼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이들과 화평을 누리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가 풍성한 화평으로 즐겁기를 원하십니까? 서로에게 온유하십시오. 온유함이 때로는 힘이 없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분노와 폭력을 가함으로 상대방을 내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상대방으로부터 저항을 받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온유함으로 상대방을 대할 때에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은 온유와 겸손으로 대하셨던 것은 예수님의 커다란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력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으셨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강력한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온유와 겸손을 우리로 배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온유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그리고 온유함으로 대할 때에 우리의 공동체를 화평케 하고, 즐겁게 하는 살리는 능력이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바울은 사랑하면 하지 말아야 세가지를 이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시기라는 단어의 뜻을 보면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젤로오’라는 단어를 쓰는데, “사랑하다 열망하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관심하는 사람이나 일에 대한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로는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샘하며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 나온 형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가인은 동생 아벨을 보고서 시기하며 분노를 냅니다. 그리고 돌로 쳐서 죽입니다. 만약 가인이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아벨에게 잘했다고 격려하며 좋아했어야 하지만, 사랑보다는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와 두 아들이 나옵니다. 둘째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그 유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갑니다. 그곳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부랑아와 같은 아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며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일하다가 돌아온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이 못마땅 했습니다. “아버지, 그 동안 나는 열심히 아버지의 일을 했어도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라고 원망을 합니다. 형이 동생을 사랑하지 않으니, 동생이 죽었다 살아온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잘 되면 그것으로 시기하지 않고 기뻐합니다. 자신을 자랑하기 보다는 자식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식앞에 교만하기 보다는 겸손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사랑의 태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다른 이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이 잘되면 시기합니다. 그리고, 나를 자랑하고, 다른 이에게 교만하게 대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계를 맺도록 주신 사람들을 상대방의 잘됨을 시기하고, 자신이 더 나은 존재라고 교만하게 자랑하라고 맺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주신 것은, 상대방의 잘됨을 축복하고, 겸손하게 상대방을 격려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살아가도록 보내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 다녔던 교회에, 한 여자권사님이 계셨는데 아이들을 좋아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이들을 만나면 자신의 애정을 반대로 표현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를 만나면 뽀뽀를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꼬집어서 아이를 울리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는 아이를 보시면서 울보라며 놀리기도 하십니다.
때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자 하시지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서투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해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주간동안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실천하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래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의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쉼을 얻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화평하고 즐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이 점차 식어지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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