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1/2021 - 여호와 앞에서 춤추라 [사무엘하 6:11-23]
여러분은 아주 기쁠 때에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십니까? 춤추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기쁘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기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는 그의 힘을 다해 춤을 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이 무엇으로 인해서 그러한 기쁨을 경험합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이 사는 다윗성으로 모실 때에 그토록 기뻤습니다. 언약궤와 함께 있는 것이 그를 그토록 기쁘게 했던 것입니다.
언약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성막 안에 있는 성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언약궤였습니다. 하나님은 조각목(acacia wood)으로 상자(chest)를 만들고 금으로 그 상자를 입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새겨진 두 돌판을 넣도록 하셨습니다.
이 언약궤는 성막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 놓여 지게 됐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를 엘리제사장 때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과 전쟁 중에 있었는데, 언약궤를 가지고 가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닏다. 그래서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지고, 언약궤도 빼앗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일로 커다란 충격에 빠졌습니다.
언약궤를 가져 온 블레셋 사람들은 신이 났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겼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진영에 들어온 다음날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언약궤를 다곤신전에 놓았는데 다곤신상이 넘어져 머리, 팔, 다리가 분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있는 블레셋 도시에 전염병이 퍼집니다.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에 언약궤가 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래서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새로 만든 수레에 실어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이스라엘 마을인 바알레유다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20여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언약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스런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변방 마을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시면서 그렇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기쁨의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계획한 일들이 잘 될 때, 시험에 합격했을 때, 병이 나았을 때, 연애할 때, 결혼할 때, 아이를 나았을 때, 하는 일들이 잘 될 때...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기쁨들을 수없이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 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다윗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이 누렸던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살펴 보면서, 다윗이 기뻐했던 것은 무엇인지를 보고, 또한 우리를 다윗이 누린 기쁨을 잘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속에 오시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요, 기쁨으로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기 전에 사람들은 언약궤에 그렇게 관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모심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삶속에 오시기를 소망하였고, 이를 기뻐하였습니다.
사실,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시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첫번째 언약궤를 옮길 때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시도만에 언약궤를 모실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들을 모아서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궤를 메고 출발하고자 할 때에, 다윗은 언약궤 앞에서 소와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올 때에 다윗만이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환영합니다(15).
그런데 단연 다윗이 최고로 기뻐합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춥니다. 그런데 그의 춤의 특징이 있습니다. 다윗이 디스코를 추었는지, 브레이크댄스를 추었는지, 춤을 잘 추었는지, 못 추었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가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옷이 흘러 내리는데도 이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기쁨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이 그토록 힘써 반겨야 할 기쁜 일이었던 것입니다.
정현종이라는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우리에게 오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면으로 볼 때 옆에 계신분들이 우리의 삶에 들어온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분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신 사건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언약궤가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신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오시고, 사람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그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노예였던 히브리민족을 강력한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 백성을 만드신 그분이 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이 오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8:10절에 보면,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다윗은 지금까지의 숱한 삶의 자리에서 함께 하시며 도우셨던 하나님, 앞으로도 자신과 함께 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을 모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힘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힘써 춤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어마어마한 일은 하나님이 우리 의 삶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가운데 들어오실 때,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우리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때에, 기쁨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고, 그것이 예배가 되고 힘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2.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왕되심을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복된 일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오심은 두려운 일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모신 것은 형통만을 원했다면 언약궤를 모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원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자 시도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첫번째는 실패했습니다.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기 전에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모시고 오려고 모든 준비를 다했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악기와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만든 수레에 하나님의 궤를 싣고, 소가 그 수레를 끌도록 했습니다. 다윗은 설레는 마음으로 언약궤를 모시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는데,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수레를 몰던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웃사가 언약궤를 붙든 것으로 인해서 그를 그 자리에서 죽이셨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더 이상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벧에돔의 집에 모셔 놓았습니다. 그 일은 다윗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거절하시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신 말씀대로 그가 따르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동할 때에는 레위자손, 그것도 고핫자손이 메고 이동하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블레셋 사람들이 했던 방식으로 수레에 실어서 옮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모시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언약궤를 모시면 오벧에돔과 같이 복받기를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복보다도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돌판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왕,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모시고 그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겠다는 결단입니다.
역대상 13:3절에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묻고 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의 뜻대로 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단순히 복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겠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복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지 아니할 때에 복이 저주가 되고, 구원이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불의한 일을 할 때에 이를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 모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가 그분이 베풀실 복과 구원을 기대하며 기뻐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왕과 그의 백성된 관계를 위해 늘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그런데 다윗의 누린 기쁨을 모든 사람이 함께 누렸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모시고 온 것에 대해서 너무 기뻐했습니다. 다윗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그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주님을 모신 기쁨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자신의 가족을 축복하기 위해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기쁨에 찬 다윗을 본 미갈은 정말 황당한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미갈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힘써 춤을 추는 모습을 창밖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왕으로서 체통없이 계집종들앞에서 경망스럽게 행동했다고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미갈은 언약궤를 모시는 현장에 있었지만 그녀는 그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사울왕과 같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 보다는 자신이 왕이 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눈만을 의식하며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길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미갈을 향해서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춤을 출 때에 자신의 백성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자신의 아내 미갈이 뭐라고 할지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왕이라는 보좌도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기뻐하는 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더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태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가져야 태도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업신 여기며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관계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미갈의 말도 일리가 있었겠지만,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왕의 체통을 버리고 힘껏 춤을 춘 다윗은 기뻐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윗 왕의 행동을 책망하며, 하나님을 기뻐한 일을 업신여긴 미갈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갈을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당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누구보다 업신여김을 당했는데, 다윗을 업신여겼던 미갈은 높여진 것이 아니라, 더욱 낮아지고 업신여김을 받았던 것입니다. 미갈은 복받을 자리에서 저주를 받은 어리석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며 기뻐하는 모습을 하나님도 보았고, 미갈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와 왕되심을 기뻐하는 다윗, 하나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는 다윗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더욱 존귀한 자로 높이셨습니다.
그런데 미갈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다윗을 천하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의 귀함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는 다윗을 업신여긴 미갈을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기도록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오시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가 오시는 일이고,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오시는 일이고, 심판하시는 심판자가 오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맞이함에 있어서, 우리가 춤을 춘다고 할지라도 그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갈과 같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삶을 업신여기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춤추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 그 기쁨을 나누며 서로를 축복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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