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7/2016 - 광풍이 불어올 때 [사도행전 27:14-25]
오늘
말씀은, 사도바울이 죄인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던 도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세계의 중심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로 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세계의 곳곳으로 퍼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소망대로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로 가는 신분은 죄수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을 죄인이라면서 잡아다가 로마인들에게 넘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이니, 로마에 있는 가이사의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겠다고 했고, 사도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바울이 타고 가는 그 배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일으키셔서 바울이 타고 가는 배를
파선시키시고, 죽음의 고비를 겪게 하십니다. 오늘,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파선을 당하는 사도바울의 모습들은,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광풍과 같은 일들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유라굴로를 대면케 하심으로, 또한 하나님을 대면케
하심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에 불어 닥치는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광풍을 통해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 개입하시고자 하심을
봅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는 무역선입니다.
죄수를 후송하는 별도의 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역선으로 운행하던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배에는 죄인들과 그들을 후송하는 로마군사들,
그리고 일반 상인들과 선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로마를 향해 출발한 사도바울이
탄 배가 미항이라는 항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 이르렀을 때에 사도바울이,
죄인들을 후송하는 책임을 맡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권면하기를, 지금 정박하고 있는
미항에서 겨울을 지내고 가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짐들과 배도 손해를 볼 것이고, 사람의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바울의 말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장과 선주의 조언에 따라서 배를 뵈닉스 항구로 항해해서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 배를 책임진 백부장은 전문가의 말을 따라 미항을 떠나, 뵈닉스 항구로 떠나게 됩니다.
사람들의
삶의 대부분은 전문가의 말에 관심하고 그 판단을 신뢰하며 따릅니다. 배의 선주와 선장은 배와 바다에 대해서 전문가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의 말에 의존하고 판단하다가
보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하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비록 항해에는 비전문가였지만,
사도바울의 말은 바울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말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모든 것의 전문가인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판단의 근거가 편한 것일 때가 있습니다.
백부장이 미항을 떠나고자 했던 이유는, 미항은 과동하기에 불편하니,
좀 더 편한 뵈닉스 항구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지만 그것 때문에 더
불편하고 죽을 뻔했습니다. 또한
전문가와 다수의 의견입니다.
전문가도 떠나자고 했고, 그곳에 있던 바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미항을 떠나자는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견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판단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에 전문가와 편함과 다수결에 근거를 삼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이지도, 고려하지도 않고 살아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덧, 이 세상에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편안한 것들이 많아지고, 커다란 세력들을 형성할 수 있는 여론들이 조성 되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바다와 배의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배가 출항을 합니다. 처음에는 바람이 참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득의한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곧 바라던 일이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전문가의 말을 듣는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래갑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14절에,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서 유라굴로 라는 광풍이 불어왔다고 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말은, 동풍을 뜻하는 ‘유로스’와 북풍을 말하는
‘아낄로’를 합성한 말입니다. 동북풍입니다.
강한 동북풍이 섬으로부터 불어옵니다. 이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서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냥 바람에 몰려가는 것입니다. 2. 이 유라굴라를 누가 보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참 무심하십니다.
사도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는데, 좋은 배도 아니고 무역선에다가, 죄수들과 가는데, 그 불편함을 피해 뵈닉스 항구로 가는데 그냥 편하게 보내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꼭 광풍을 부셔서 그렇게 고생을 하게 하시니 참 너무 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통한 교훈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편안히 로마로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 광풍을 만남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십니다.
1) 먼저, 유라굴로는 사람의 어떠한 노력도 허사이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광풍입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날 때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보통 때는 계획한대로 뭐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옵니다. 광풍을 만나니까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노를
저어도 안되고, 돛을 올리거나 내려도 안됩니다. 키를 잡고 있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수고하면 할 수록,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바람이 불어 오는 데로, 아니 하나님께서 모시는 대로 몰려갈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십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15절에,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라고
했습니다. 이
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문가가 할 수 없고, 다수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광풍을 주시는 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전능자를 깨닫는 것입니다.
2) 또한 유라굴로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며칠
동안 광풍에 몰려다니던 배위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져서 배의
파선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짐을 버리는 것도 부족해서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버린 짐들속에는 대부분 귀한 물건들이었을 것입니다.
무역하려고 그렇게 수고해서 사 놓은 값비싼 물건들을 버려야 했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서 늘 지니고 다녔던 물건들을 버려야 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소중하게 장만한 선물들도 버려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배를 운행하던 기구들도 버려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그것들을
가지기 위해서 그들은 피나는 노력을 했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을 맞게 되니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죽게 되니까
자기 손으로 버려야 할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의 실상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버려야 할 것들이 아닙니까? 지난
화요일 밤에, 샌안토니오 지역에 아주 이래적인 기상현상이 있었습니다. 샌안토니오의 넓은 지역에 우박이 떨어진
것입니다. 콩알만한 우박이 떨어진 곳도 있었지만, 골프공만하거나 야구공만한
우박이 떨어진 곳도 있었습니다. 그토록 아끼는 집의 지붕과 벽이 깨지는 피해도 있었습니다. 애지중지 기르던 정원의 꽃들과 채소들이 망가졌습니다. 무엇보다 밖에다가 세워 둔 차들의 유리가
깨지고, 차체가 찌그러지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예쁘게
가꾸던 것들이 한꺼번에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그냥 손을 놓고 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유라굴로를 저와 여러분에게 보내십니다.
그래서 그 동안 하나님 이외에 집착했던 세상의 것들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내가 스스로 그것들을 바다에 던지게 하십니다. 그것들이 나를 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그것들 때문에 내가 죽을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그 무엇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18절에서는 사람들이 바다로 버린 것들을 짐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왜 짐입니까? 그전에는 그것은 보석이고, 보물 제1호였고,
나를 먹여 살리는 생계였습니다. 배를 항해하는 귀한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유라굴로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은 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손으로 버릴 때에
이것이 짐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소유한 것이 행복이 아니라 짐인 것입니다. 다 버렸습니다. 배에 있는 모든 연장, 기구를 다 버렸습니다.
배 항해를 하는데 필요한 기구를 다 버렸으니 마지막 보루를 버린 것입니다. 3) 때로 하나님은 유라굴로를 통해 깊은 절망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바다에 던져버렸는데도 그들에게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20절에 보면,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밤에 해가 안보이고, 밤에 별이 안보였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바다에서 떠 다니면서 다닙니다. 이럴
때에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풍랑은 계속 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여망, 끝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입니다. 먹지도
못해서 힘도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제 제로에 가까워 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절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우리가 절망했을 때에 하나님은 시작을 합니다. 인간이 절망했을 때에 가난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가난해지고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2) 이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소망을 발견케 하십니다. 관심을 하나님께로 이끄십니다.
그
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아니었고,
하나님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짐을 잘 옮길까? 바울의 말은 그것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서 바울에게 관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시면서 하나님께로 그들을 돌이키십니다. 이것이 유라굴로가
주는 유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절망 가운데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21절,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하였느니라”그러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소망을 줍니다. 22절에,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니라.
왜냐하면 어제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
설 것이고, 바울과 함께 한 자를 다 바울에게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할 때에 배에 탄 사람들의 관심이 바뀝니다.
배와 바다의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도바울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수고가 다한 후에 이제, 하나님께서 바울을 세우시고, 그로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라굴로가 주는 유익입니다. 3.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풍, 광풍 모두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처음
미항을 떠날 때에 그 사람들은 순한 남풍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뵈닉스로 분명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순풍을 통해서는 자신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원하는 목적지로,
자신들이 항해하는 배를 잘 몰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이 하는 일입니까? 내가 목적지에 갈 수 있고,
모든 것이 득의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하는 것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순풍을 주실 때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상황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미풍도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반면에
광풍은 강하게 하나님의 주장하심을 경험케 하십니다.
광풍이
없었으면, 물건이 파괴되고 목숨이 위태한 지경까지 가지 않았으면, 그 배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관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배가 미항을 떠나 무사히 뵈닉스에 가는 것에 관심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워 놓은 목적지에 가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순풍이나 광풍을 통하여, 하나님이 목적지이고, 도착지임을 알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순풍에
있으십니까? 광풍 속에 있으십니까? 내가 원하는 도착지에서 멀어졌습니까? 가까워 졌습니까? 그것보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이라는 항구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풍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광풍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항상 주장하십니다. 그렇게
하셔서, 사람의 계획과 능력을 꺾으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전능하심이 있음을 드러내시고,
사람으로 그것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25절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믿음이 없으면 순풍이든 광풍이든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바람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풍에 처하든, 광풍을 처하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시면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대면하고, 그 분 앞에 자신의 삶을 더욱 맡겨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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