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9/2016 - 아버지의 아들 [누가복음 15:18-24]
오늘은 아버지 날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시는 아버지들을 보시면서 또한 함께 인사하시겠습니다. "Happy Father's
Day"
한국 텔레비전 방송 중에서 "수퍼맨이 돌아왔다."라는 유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둔 연예인
아빠를 등장시켜서, 아내 없이 자신의 아이를 혼자 48시간을
돌보게 하고, 그 모습을 방송합니다. 그런데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수퍼맨이 돌아왔다." 아빠는 아이들에게 수퍼맨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빠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정 밖에서 일하면서 아이들을 떠나
수퍼맨이 해야 할 아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정안에서 아빠의 존재가 점차
약화되고 잊혀지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러한 아빠들을 아이들에게 다시 돌려 보내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면서 가정안에서 아빠의 존재의 중요함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아빠와
아이들간에 애정 어린 관심과 행동들을 보면서,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방송에서 또 다른 감동은, 방송에 출연한 아빠들이, 자신들의 수퍼맨이었을 자신의 아버지들에 대해서 회상하며 그분들을 이해하는 장면입니다. 아빠가 되고 보니 자신들보다 더 무거운 삶의 무게들 속에서 힘들어 했을 아버지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아버지가
그 때 왜 그러셨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먹먹해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늙으신 아버지를 찾아 뵙고 진심으로 감사함의 말씀을 전하고, 더욱
아버지를 이해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녀를 가진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그 뜻을 거스리며 살아가는 자녀를 두고 산다면 참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아들을 가진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그런데 두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버지를 근심되게 하는 아들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요구하는 것이 자신에게 해당하는 유산을 먼저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병에 든 것도 아닌데, 그러한 무례한 요구를 합니다. 그 아들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떠나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간섭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면, 참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신 샘치고서 자신은 그 재산을 가지고서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작은 아들은 먼 타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타국 땅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다시 아버지가 계시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큰 아들은
그러한 자기 동생을 반겨주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신의 동생으로 인해서 불쾌해 합니다.
예수님은 두 아들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그 분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아버지요, 곧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한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를 떠나,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때로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더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를 떠나 탕자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알게 됩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그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데, 그 아들은 그 재산을 모아다가 먼
나라로 떠납니다. 아버지의 손 미치지 않는, 아버지의 관계가
단절된 곳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들에게 유산을 먼저 챙겨서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도 이상합니다.
그러한 자식이라면, 혼을 내서 떠나지 않게 하던지, 빈손으로
내 쫓을 만한데,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손에 재산을 쥐어서 보냅니다. 어차피 떠날 것을 알기에, 잡지 못하고 떠난 아들의 뒤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떠난 삶이 어떠한 삶인지 둘째 아들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행복해 지겠다고 아버지를 떠났는데 그것도 잠시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에게 썼습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모두 낭비를 했습니다. 그 많던 재산들이 없어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돈을 다 탕진한 이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서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를 친다는 것은 부정한 일입니다. 유대사람들은 돼지를 부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먹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이방사람들을 위해 부정하다고 여기는 일들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배를 채울 수 없는 허기가 몰려 옵니다. 둘째
아들은 그 허기진 배를 좀 채워보겠다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좀 먹어 보려고 하지만, 그 쥐엄 열매를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돼지만큼이라고 취급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돼지 보다도 못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거들떠도 안보는 무의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돼지에게는 쥐엄열매를
주어도, 둘째 아들에게는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인생은 아버지를 떠난 이후에, 그 인생에서 가장 추락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아버지 재산만 있으면 자신도 존귀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 돈이 다 떨어지고 나니까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존귀한 자였는데, 아버지를 떠나서 살다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별볼일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는 사실 그 존귀함을 잃어버립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에, 돈이 많고, 권력과 명예가 많으면 자신들이 존귀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고,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과 명예인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존귀함을 잃어 버렸던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는 존귀한 존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많은 업적과
영예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영원하지 않은 허황된 것입니다.
2. 그런데 둘째 아들은, 자신의
형편없는 모습을 보면서 한가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은, 자신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잊었던 아버지를 회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 깨달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었을 때가 얼마나 존귀하고 풍요한 때였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이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 그 아들로서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를 그 때서야 깨달아진 것입니다.
17절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전에는 몰랐는데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돌아가려고 보니까,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가기에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괘씸함을 자각했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그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자신을 아버지의 품꾼의 하나로 여겨줄 것을 기대하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한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그 아들을 먼저 보고 만나려고 달려간 사람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를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아들을 기다립니다. 늘 아들이 올 먼 길을 바라보면서 기다리십니다. 멀리서 아들과 비슷한 사람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심장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아들이 아닌 것을 알고 수많이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아버지는 그 아들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올 때에, 아버지는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아들에게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해서 볼 상 사나 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아들을 안아주고 입맞추라고 하면 역정을 낼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측은히 여기는,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더 추하면 추할수록, 더러우면 더러 울수록 더 불쌍히 여겨서 안아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잘못하면 잘못 할 수록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서, 아버지 아들로서 일컬음을 받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과 손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서 그를 존귀한 자신의 아들로 받아 주십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살 때에, 그를 진정으로 존귀하게 대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고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그를 자신의 아들의 존귀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존귀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아버지의 자녀임을 깨닫고 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두다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던 자식이 돌아왔다고
기뻐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존귀하게 여겨주시고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일이 많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소중하고 존귀한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살아갈 때에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인 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그것을 보고서 불평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하나
잡아 주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셨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에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그 잃어버린 재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죽었다고
여겼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고, 마땅한 일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의 눈에는 살아 돌아온 자기 동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추악하게 살다가 돌아온 정죄받을 동생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첫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함께
기뻐할 수도 없었습니다.
'렘브란트'라는 화가가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꼭 안아 줍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손을 자세히 보면 양손이 다릅니다. 한 손은 어머니의 손이고, 한 손은 아버지의 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의
모습도, 아버지의 모습도 함께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뒤에서 옆에서 못마땅하게 째려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 아들입니다.
헨리 나우엔이라는 '영성신학자'는
그 그림을 몇 시간 동안 바라보면서 묵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림 속에 나온 탕자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꾸만 보면서 자기가 바로 그 집 안에 있는 큰 아들인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지만 마음이 굳어지고 완악해져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합니다. 그러면서 12절에 보면,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사람이 장성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그리고 이방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알기 원하십니다.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살겠다고 세상의 물질을 따라 떠나는 아들을 붙잡을 길 없어서 안타깝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보내야 했던 그 아버지의 마음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며, 존귀함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그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 말입니다.
그리고, 비록 거지와 같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고서 돌아올 때에 불쌍히 여기시며,
얼마나 진심으로 기뻐하시는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이 땅에서 우리가 존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죄된 우리를
용납해 주시고, 자신의 아들로 삼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에 풍요합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의
존귀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아주시며,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합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늘 함께 살면서, 하나님이 아파하실 때에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실 때에 함께 기뻐하며,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에 늘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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