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9/2020 - 예배자를 세우시는 메시야 [말라기 3:1-4] - 대림절1
운전을 하다가 911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운전자들은, 구급차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속도를 줄이고 길가에 자신들의 차를 세웁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저 구급차는 간절히 기다려지는 구원의 손길일 수 있기에, 사람들은 기꺼이 구급차에게 자신들의 편의를 양보합니다.
사람들이 고통이나 위험한 일을 당할 때에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을 애타게 찾고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대적들의 공격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가는 등과 같은 어려울 때에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올 것에 대해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말라기 예언자는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그들에게 보내주시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유다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유다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하면서 살고 있었을 때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했을 때가 기원전 400년경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유다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이미 해방되어서 유다땅에 돌아온 상태였습니다. 유다 땅에 돌아온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었던 솔로몬시대에 지어졌던 예루살렘 성전을 기억하며, 비록 처음 성전보다는 작지만 새로운 성전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지도력으로 예루살렘 성벽도 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곧 영광스러운 시대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엇인가 지체되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영광된 변화는 없고, 도리어 기근과 흉작이 덮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 소홀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보시기에 악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게 되면 죄악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죄악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부터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시는 신약시대까지, 약 400년 동안을 신구약 중간기(the 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은 영적인 암흑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어두워져있는 유다사람들을 보면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가 이 대림절의 기간을 지내면서 어떠한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유다사람들은 영적인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대한 회의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말라기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유다인들이 처한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다윗시대와 같았던 이스라엘의 영광된 때는 오지 않고, 비록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페르시아의 영향력 속에 여전히 있었고, 자연 재해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드는 그들의 의문은, "하나님은 우리를 관심하고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라는 물음들입니다.
당연한 질문이고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의문에 지배를 당해서는 안됩니다.
일본인 기독교 작가인 엔도우 슈샤쿠(Endo Shusaku)가 쓴 ‘침묵(Silenc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17세기, 당시 일본 정부인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기독교를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일본정부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발로 밟고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만약 사진을 밟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일본 정부는 그들을 심하게 고문하고 불에 태워 죽이거나 바다에 빠뜨리거나, 머리를 제외한 몸을 땅에 묻거나, 펄펄 끓는 온천 물에 그들을 던져 넣었습니다.
이러한 박해 때에 유럽에서 일본으로 파송되어 일본 교구장을 맡았던 페레이라(Ferreira) 신부가 성화(Sacred Picture) 를 밟고 배교했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진상을 파악하고, 선교를 하기 위해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인 로드리고 (Rodrigues)신부가 몰래 일본에 잠입했습니다.
그리고 로드리고 신부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받고 말할 수 없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그는 혼돈속에서 질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저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침묵하시는가? 혹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온갖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 후, 로드리고 신부도 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할 것을 강요당합니다. 그가 거부하자 일본 관리는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선택을 하게 합니다. ‘당신이 배교한다면 저 일본인들을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너와 농민들 모두 잔혹하게 죽게 될 것이다.’
그 순간에 로드리고 신부는 성화(a sacred picture)를 밟고 배교했던 사람들, 특별히 그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를 떠올립니다. 선량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평생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야 했던 스승의 비참해 하던 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괴로워 하던 순간에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었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사람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신부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밟습니다.
비로소 로드리고 신부는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세상 사람들에게 똑같이 수치를 당하시며, 고통을 당하시며 함께 잔혹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자신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도 그들의 죄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할 따름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스라엘아, 너희 두 형제 야곱과 에서가 있었는데 내가 너를 형, 에서보다 더 너를 사랑하여 너를 택하지 않았느냐? 지금도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냐? 과거의 역사를 생각해 봐라, 그 힘든 중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보여 주었던 사랑의 사건들이 기억나지 않느냐? 난 널 사랑한다. 왜 이것을 모르느냐?”
주변의 상황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상황이 좋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렇지 못하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로 생각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제사에 문제가 생깁니다.
말라기 1:10절,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없이 제사를 드리니 제사가 외식이 되고, 경외함 없이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을 멸시함이 되었습니다.
… 하느님은 그런 제사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지ㅜ않ㄴ.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있고, 아닌 제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세상과 이방우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의 제사가 더러워졌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참 예배가 무너진 원인은 제사장들의 죄가 큽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정기적인 제사, 거기에 백성들의 요구로 지속되어지는 제사가 번거로웠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특권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없고,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니 이러한 모든 것이 짐이 되었습니다.
1:7절에 그들이 드린 떡을 더러운 떡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당시에 성전에서는 진설병(the bread of the Presence)이 드려졌습니다. 누룩없이 구운 빵으로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심을 상징하는 제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 수, 12에 맞게 빵을 12덩이를 성소의 상위에 2줄로 쌓아놓았습니다. 그리고 안식일마다 묵은 떡(bread)은 새 떡으로 교체되었고, 묵은 떡은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먹게 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그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들은 매 주마다 새 떡을 올려놓아야 하는데, 새떡이 아니라 전에 썼던 떡을 다시 올려 놓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겉 모양만 갖추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식은 떡, 묵은 떡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더러운 떡이라 하셨습니다.
제물로 드릴 짐승을 드릴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 났습니다. 그들은 상처가 없이 깨끗한 소나 양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데, 이제는 아무거나 드렸습니다. 그들은 상처가 난 것, 병든 것, 이런 것을 드려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러운 가축을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반문을 하셨습니다.
“너희 제물을 세상의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들이 기뻐하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주어도 기뻐하지 않을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인 나에게 드리느냐고 하나님은 반문하셨던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제사, 예배를 소홀하게 여기게 되고, 물질적인 봉헌도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경외함없이 살아다가다 더러운 죄가운데 빠지게 되고, 죄가운데 드려지는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3. 이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를 통해서 하시거자 하시는 일은 메시야를 통해서 사람을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제사를 드리는ㄴ 예배자를 세우는 일이셨습니다.
4절에 보면,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유다사람들이 드리는 봉헌물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불순한 마음을 해결하지 못하면, 외적으로 대단한 제사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더러운 떡, 합당치 못한 제물을 드린 것은 단지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죄로인해 더러워진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더러운 것을 제거하시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하셨습니다.
3:2절에 보면, 메시야를 묘사하기를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메시야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고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야는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금을 연단할 때에 뜨거운 풀무불이 필요합니다. 뜨거운 불에 금에 있는 불순물이 제거되어 순수한 금이 나오게 됩니다.
잿물은 옷감을 깨끗하게 할 때 사용됩니다. 세상에 옷을 깨끗하게 하고, 바닥의 더러운 카펫을 깨끗하게 하고, 건물을 깨끗하게 하는 많은 세제들, 표백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깨끗게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태우실 불이요, 깨끗하게 씻으실 잿물이 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세주로 보내주신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는 유일한 불이요 잿물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메시야는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레위자손은 하나님의 성막에서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 레위자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죄인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깨끗한 레위인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메시야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 기뻐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자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믿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이들은 결국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들로 회개하고, 정결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의 더러운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범죄하기 쉽습니다. 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할 때에 정결케 되고,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며,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상실했을 때에, 그들…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였고, 그들이 드리는 제사 또한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외식적인 제사가 되었습니다.
유다백성들의 위기는 그들이 하나님을 제사하는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는데, 이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부정한 백성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부정케 된 그들에게 메시야를 보내시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 사람들의 더러운 마음을 불과 표백제로 깨끗하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도, 죄인된 우리가 깨끗함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셔서 입니다.
우리가 이 대림절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셨음은 우리 예배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과 경외함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오심을 확증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의 삶은 예배의 삶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모든 예배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로 드림으로, 구원의 주님이 우리가운데 있음을 확증하는 대림절기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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