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2020 - 구원과 사랑의 이름, 임마누엘 [마태복음 1:18-23] - 대림절 4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그 과정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곧 성령으로 잉태하게 됩니다.
마리아의 임신 사실은 그녀와 약혼한 요셉에게는 아주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마리아와 헤어지고자 했습니다. 이 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셔서,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요셉은 마리아와 헤어지지 않고, 그 아이를 낳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천사는 마리아나 요셉 모두에게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미리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육신적인 부모가 재어 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기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 아기 예수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는 도움이시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여호수아’ 라는 이름이 후에 ‘예수아’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라는 히브리 이름이 예수님 당시에 헬라어로는 ‘이에수스’ 입니다. 한국말로 ‘예수’는 ‘이에수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이에수스’라고 부르면 몇 사람이 동시에 돌아 볼 만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여호와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원에 응답하셔서 구원자 예수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요셉에게 나타난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말한 후에, 또 다른 이름 하나를 알려 줍니다. (그 이름이 무엇인가요?) 그 이름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입니다.
이사야 7:14절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처녀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나서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은 임마누엘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임마누엘’ 은 히브리어인데, ‘임’은 ‘함께’ (with), ‘마누’는 ‘우리와’ (us), 그리고 ‘엘’은 ‘하나님’ (God)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건이요, 그것이 곧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여러가지 정의를 할 수 있겠지만, 오늘 말씀을 보았을 때에,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상태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알려 주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케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복되게 하시고 구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는 야곱의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그때 자신이 철저하게 혼자이고 절망적인 상태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 중에 야곱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창 28:15)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경험하는 인물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의 구원은 사람이나 물질의 소유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 상태는 구원의 상태가 아니라 아직 죽음의 상태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 그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원자를 찾습니다. 가까운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더 심각한 상태이면 911을 찾기도 합니다. 돈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여기고 돈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고, 그 사람들 중에 자신을 어려움에서 구해줄 사람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진정한 구원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곧 죽어서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곧 죽어서 하나님이 안계신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구원받는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죄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구원을 이루고자 열심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민족보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밤낮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날마다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심으로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함을 피부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는 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자신들을 광야로 데리고 와서 고생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할 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곤 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애굽 신들에게 돌아가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그들에게 구원이 됨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지도자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에 달렸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재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은 그 일로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진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진노케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할까 하여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출애굽기 33:15절에, “주님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그들에게 진노하시지만, 그래도 그 백성들이 구원받을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모시고, 그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이제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지만, 그 근본에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함께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이 세상 사람들을 만드신 것은 그들과 사랑을 나누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지만, 이를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하시고자 하셨지만, 그들과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숨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향 교회에서 믿음생활 할 때에, 한 권사님께서 자기 아들이 어디갔는지 없어졌다고 걱정하시면서 찾으셨던 일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께서 아이를 찾지 못하시고, 집에 들어오셔서 누우시려고 이부자리를 장롱에서 꺼냈는데 그 아이가 그곳에서 자고 있더랍니다. 그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엄마한테 잘못한게 있어서 혼날까봐 장롱안에 숨어있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끼리도 갈라지게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함께 있지 못하도록 갈라 놓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곧 구원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 목적… 죄짓게 하는 것은 갈라놓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소홀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끝내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시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성탄의 계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더욱 경험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통해서 확증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임마누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파라’는 ‘곁에서’, 그리고 ‘클레토스’는 ‘훈계하다. 위로하다. 돕다.’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곧 성령님은 우리 곁에 함께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여전히 임마누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둠의 죄의 간격을 넘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주님의 구원의 구원을 이땅에 이루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순서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짐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함으로, 주님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며,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