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9/2015 - 하나님께서 쓰시는 용사들 [사사시 7:2-8]
영화 ‘300’은 기원전
480년 실제로 벌어졌던 페르시아군과 그리스 스파르타 용사간의 전투를 소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은 숫자적으로 과장된 것이 많이 있는데, 영화에서는 페르시아
100만 대군과 맞서서 싸웠던 300명의 그리스 스파르타 용사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싸움은 무모해 보였지만, 자신의 왕국을 향한 충성과 담대한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300명의 용사들은 그렇게 100만 명의 군대와 맞서서 무모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장렬히 전사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수다한 대적들을 상대로 싸운 이스라엘의 300명의 용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죽음과 패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군을 맞아서 대승을 거둡니다.
사실 300명의 군사로 대군을 상대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쓰실 때에 그들이 사용받고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300명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선별하신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 때만 되면 겪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민족들이 쳐들어와서 곡식을 약탈해 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미디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남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민족인데도 추수 때만 되면 곡식을 약탈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알면서도 그들을 당해 낼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고해서 거둔 곡식을 빼앗기기가 일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어떻게 좀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 사사를 한 명 부르셨는데 바로 기드온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과 맞서서 싸울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사람이 삼만이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사실 그 숫자도 적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숫자가 많았습니다.
사사기 7:12절에 보니까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그리고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연합해서 진을 치고
있는데 메뚜기의 중대함 같고, 약대의 무수함은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삼만이천명의 사람도 승리를 장담하기에는 넉넉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명령하시기를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사람들과 싸울 사람들을 선별을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사람이 300명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적자들과 싸우겠다고 왔지만,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선별해서 쓰신 사람은
300명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삼백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심이
드러났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사용되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을 쓰셔서 하나님의 승리하심을
경험케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 먼저 대적자들에 대해서 담대한 사람들을 선별하셨습니다. 삼만이천명의
사람들이 미디안 사람들과 싸우겠다고 모였지만,
그들 중에는 미디안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아시고 그들을 추리십니다. 적들을 만날 때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 그 두려움을 퍼트려서 사기를 저하시키기가 쉬운 것입니다.
모세가
정탐꾼 12명을 가나안에 보내었을 때에, 이 열둘이 모두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같은 사람들을 보았고, 같은 성을 보았고 같은 농작물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은 말하기를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을 거인이고 우리는 그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아서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보고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덩달아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쳐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두려움은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두려움은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되고, 다른 사람들로 원망하게 하고, 싸우지 못하도록 만들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별하신 사람들은 적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두려운 상대를 맞이해서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누구를 의지하느냐에 있습니다. 열
두 명의 정탐꾼 중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도 두려움 속에 사로 잡혔던 열명의 정탐꾼과 동일한 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호소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우리의 밥이 될 것이다.”두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보면서 열명의 정탐꾼이
보지 못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보았기 때문에, 비록 자신들은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기 때문에 담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만 있다면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을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에게도 직면해야 할 많은 두려운 상황과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제적인 문제 앞에 약해져서 걱정과 염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육신적인 건강도 그렇고, 자녀를 양육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때도 그렇습니다. 장래를 두고도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돈이나 사람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지켜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에 담대하게 우리를 두렵게 하는 영적인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려움을 주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근심과 염려 속에 사로 잡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럴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며 담대하게 악한 세력과 대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한국의 1960-70년대에는 먹을
것이 그다지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 것인가가 삶의 문제였고 그것이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에 성도들은 그러한 두려움과 맞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 때에 성미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쌀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먹을 것이 풍부하지 못했지만 밥을 하고자 쌀을 풀 때에 첫번째 푸는 쌀은 성미그릇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솥에다가 쌀을 부어 밥을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을
때에 도리어 그 성미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을 풍요케 해 주실 것을 믿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있다면 도리어 그것을 주님 앞에 맡기십시오. 내가 뭔가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가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마시고, 도리어 그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 두려움을 취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에 뭔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문제가 있어 보여도 그것에 눌리지 않고 담대하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두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일단 추려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대적자들과 싸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3만 2천명 중에서 2만 2천명이 탈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만명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만명을 가지고서도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지시는
그 일만명을 데리고 물가로 데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을 마시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을
마실 때에 물 마시는 모습을 보니까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을 마실 때에 몸을 엎드리고 혀로
물을 핥아서 개의 모습처럼 마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물을 떠서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미디안 사람들과 가서 싸울 사람들은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사람이니 그들을 데리고 미디안 사람들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뽑힌 사람이 몇 명인 줄 아십니까? 겨우 300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방법을 쓰셨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 무릎을 꿇고 손으로 물을 떠서 먹은 사람들이 엎드려서
먹은 사람에 비해서 군사로서 싸울 만한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려 보내시고, 그 중에서 적은 사람들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을 마실 때에 자세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개가 물을 핥아 먹는 것처럼 엎드려서 먹었고, 다른 이들은 무릎을 꿇고 손으로 떠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엎드려서 먹는 자세는 적들이 공격해 올 때에 위험한 자세입니다. 적에 대해서
경계할 수도 없고 대응할 수도 없는 자세인 것입니다. 싸우는 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도 늘 경계를 하면서 먹어야
합니다. 초원에
사는 맹수들이 사냥을 하기 위해서 잠복하는 곳 중에서 한 곳이 호수지역입니다. 왜냐하면 초식동물들이 어쩔 수 없이 물을 마시러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맹수들을 의식하는 동물들은 물을 마실 때에도 물에 정신이 팔려서 먹지 않습니다.
주변을 살피면서 먹습니다. 언제라도 맹수들이 나타나면 바로 도망갈 준비를 하면서
경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 중에서 하나가 늘 깨어서 경계하는 신앙입니다. 아무리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만용하지 않아야 하고, 늘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거짓교사들이 마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들어와서 교회를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물을
마시는 일상적인 일에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삶을 파고들어서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켜 버립니다. 늘 깨어서 경계할 때에 유혹과 시험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고 담대하지만, 그렇다고 만용하지 않고 늘 경계하며 깨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싸울 사람으로 택하셨던 것입니다. 3. 그리고 그 남은 300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00명의 사람들이 뽑혔습니다. 남겨진 숫자를 보니 미디안 군대를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숫자였습니다.
삼만이쳔명이 모였을 때에는 한번 해 볼만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었겠지만, 현재
삼백명을 데리고서 싸움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더 두려운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삼백명의 사람들은 숫자가 적다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담대하게
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 호전적이고
침략을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싸움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할 것을 믿었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삼백명의 용사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적진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칼과 창이 아니라, 횃불을 항아리 안에 숨기고
나팔을 들고 밤에 적진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쟁방법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지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순종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어느 날,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는 두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성 프랜시스는 이
두 후보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주었습니다. "저 밭에 나가면 배추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가져다가 뿌리를 하늘 쪽으로 향하게 하고 심으시오.” 한
사람이 말없이 그 배추를 들고 나가서 프랜시스가 시킨대로 뿌리를 하늘로 해서 배추를 심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성자가 여기서 오랫동안 도를 닦더니만 뭔가 이상해졌구만…’하면서 배추를 제대로
땅에 심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프랜시스는 제대로 배추를 심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당신은 선생으로서의 자격은 있어도 제자로서의 자격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뽑힌 300명의 사람들의 최종적인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사람들과 싸울 사람들을 뽑는다고 한다면서, 싸울만한 자격을 한번도 테스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할 때에도 그들이 싸울만한 사람으로서 자격이 있을까? 스스로 자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법이
충족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과 나의 방법과 생각을 내려 놓도록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사용받을 만한 자격이 있고 능력이
될까라고 의심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미디안
군대와 싸우려고 한다면, 적어도 칼과 방패를 잘 쓰고, 힘도 꽤 쓸
수 있어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뽑으신 300명의 사람들도 그러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뽑으셨고, 그래서 과연
하나님이 하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 삼백명의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횃불과 항아리 들고 적진으로 밤에 몰래 들어가라고
하니까 그대로 순종하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디안 진영안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보니까 그들이 폐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 무너뜨렸는데 이것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칼이 되어서 미디안과 그 군대를 칠 것이라는 두려움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대로 경계하지 못하고
분별력 없이 행동했습니다. 미디안의 300명의 용사들이 적진에 들어가
항아리를 깨어서 횃불을 비추고, 나팔을 부니까 그렇게 많은 적들이 정신이 없었습니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미디안, 아말렉과 동방의 사람들이 서로가 적인지 알고 그 밤에 정신없이
서로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적들이 서로 싸워 죽이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어떠한
희생도 치르지 않고 크게 승리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숫자가 많다가 쓰시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싸울 만한 능력이 있다고
여기져서 쓰시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연약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사용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대적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자와 같이 덤비는 신앙의 대적물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담대한 자들을 하나님은 쓰십니다. 그들은 도리어 어려움이 있을 때에 주변에 용기를 부어주고 도전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이들을 쓰십니다. 그리고, 늘 경계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사탄은 광명한 천사와 같이 유혹하고 미혹합니다. 이러한 사탄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고
늘 경계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으신 이끄심과 방법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삼백명의 사람들을 추려내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삼만이천명의 사람들이 많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만약 전쟁에 승리하면 스스로 했다고 자신들을
나타낼 것이 뻔하고,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숫자가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자랑하기에는
많다고 하셨습니다. 300명이 메뚜기 떼와 같이 중다한 사람들을 이겼다는 것은 삼백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그 일들을 했다고 자랑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의 승리를 통해서 오직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두려워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그리고 두렵지 않다고 만용하는 자가 아니라 담대하지만
늘 경계하며 깨어 있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승리케 하심을
날마다 체험하시고, 주님의 행하심을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요,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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