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1/2019- 부활의 새생명을 살자 [갈라디아서 2:20]
이번 고난주간에 많은 사람들을 탄식케 했던 화재가 있었습니다. 850년간 프랑스를 대표하던 기독교의 위대한 건축물인,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에 4월 15일 저녁 화재가 난 것입니다. 대성당의 상징물인 첨탑에서 시작된 불이 첨탑을 태우고, 지붕으로 번졌습니다. 수 많은 나무기둥으로 만들어져서 ‘숲’이라고 불린 지붕 또한 삽시간에 전소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96미터 높이의 첨탑이 화염에 쌓여 꺾여서 땅으로 곤두박질 때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움까지 느꼈습니다.
불에 속절없이 타들어가는 대성당을 보면서 사람들은 참담한 모습으로 탄식을 했고,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는 함께 노트르담을 다시 지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성당을 다시 재건할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성당, 그리고 프랑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를 다시 재건하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은 다만 외형적인 성당의 모습이겠습니까? 성당 건물은 불타 없어져도 좋으니,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그 믿음이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 무너져 내린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도 있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로마황제가 자신을 신으로 자청하며 로마 제국 전역에 있는 신전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라고 명령했을 때에, 유대인들은 황제의 명령에 대항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와 유대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티투스 장군이 로마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 들어왔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초토화시킴으로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때 티투스 장군은 모든 벽들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는데 유독 예루살렘 서쪽 성벽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가 얼마나 튼튼한 성벽을 무너뜨렸는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서쪽벽은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남겨진 서쪽 벽은 지금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며, 성전 파괴 당시의 참담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40여년 전에 이미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2:19절에서, 건재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그 말을 듣고서 웅성거립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년동안 지어진 것인데, 네가 어떻게 삼일 동안 일으키겠느뇨?”
예수님께서 헐라고 한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인 헤롯이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을 통치하는 왕으로 세움을 받은 후,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세운 성전입니다. 자신이 다스릴 유대인들하고 좋은 관계를 가져야 그들을 통치하는데 문제가 없으니까 유대인들에게 크고 멋진 성전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왕이 지은 성전은 신앙적인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성전은 무너져 내릴 것이고,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삼일 동안에 일으키시겠다는 성전은 헤롯이 지은 건물로된 성전이 아니라,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주요 기능은, 죄지은 사람들이 용서함받는 속죄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사람들의 죄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로 가는 일은 건물로 된 성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삼일동안에 일으키시겠다고 했던 성전을 자신의 몸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부활 이후에는 건물로 된 성전에서 더 이상 짐승제사를 드려서 죄사함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70년에 파괴된 후 재건되지 못하였고,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비록 건축물로서의 성전은 무너졌지만, 죄인된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구세주임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회개할 때에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줄로 믿습니다. 참된 구원에 이르는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세워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도바울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새생명을 얻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자신안에 부활하셔서 사심을 사도바울은 경험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천년전의 예수님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날마다 경험되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안에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께서 주신 부활의 새생명을 어떻게 이 땅에서 누리면서 살 수 있을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죽을 때에 비로서 예수님과 같이 부활의 새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며 감사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위해서 전제되는 것은 그의 죽으심입니다. 죽은 이후에 부활이 있는 것이지, 죽음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 또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바울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올라가서 못 박혀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죄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듯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의 죄성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당시 최고의 스승인, 가말리엘로부터 율법을 배웠고, 바리새인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인 학문도 뛰어나서 여러 철학자들을 상대로 변론하기도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학문이 바울을 미치게했다고 할정도로 학문에도 능했습니다. 또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사회적으로도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을 보니 자신은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그 동안 생각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핍박했던 일이,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핍박한 아주 심각한 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됨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죄된 모습을 깨닫지 못해서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가정안에서 자신은 좋은 부모요, 자녀라고 여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남편 아니야? 나 같은 아내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교회안에서 좋은 교인이요, 사회적으로도 훌륭한 사회인이라고 자부하면서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선의 기준을 자신이 정하고 살았다면 그것은 죄된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내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여기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내가 죄된 사람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러한 죄된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죄된 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죽음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영생을 살아가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이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나서 내 삶의 지표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 전의 사도바울의 삶은 자신이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이었지만, 이제 자신이 죽고 나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장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에 경청하며 순종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는다고하지만 아직도 내 뜻과 고집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덤속에 계속 가두어 놓으려는 태도의 사람입니다.
“예수님,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나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는 제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제발 무덤속에서 잠잠히 계셔 주십시오.”
오늘날 이 땅에 예수님을 무덤속에다가 가두어 두고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요 교회가 이 땅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속에 오셔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 이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예수님을 죽은 자처럼 취급하며, 자신이 살아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예수님을 살려 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안에 사실 수 있도록, 나는 죽고 우리의 삶의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도바울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자신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몰랐고, 그분이 날 위해서 죽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말쟁이로 여기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되니까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부활의 사건은 자신과 무관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자신을 죽음에서 다시 살린 자기 부활의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사랑과 죽으심을 믿게 되니까, 그 삶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자신도 사랑하게 되며,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날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이있고,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죽는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이 내 안에 사는 것을 증거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개인적인 신비로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죄인된 저와 여러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성전되시는 사건이고, 또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도 또한 죄의 삶이 아니라, 부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죄된 존재임을 깨닫고 죄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합니다. 사실 내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내 욕심과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 죄의 삶이고 그 결과는 사망인 것을 깨닫기에 날마다 우리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는 증거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안에서 계시면 예수님을 나도 사랑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며, 예수님을 무덤속에 묻어 놓고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로 즐비합니다. 이 때에 믿는 성도들은 예수를 무덤에 가두어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된 모습을 더욱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드러내는 부활의 새생명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