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0/2022 - 에덴동산에서 살기 [창세기 3:1-6]
https://youtu.be/mcbGCD5Xma0
요즘 강대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는 조짐으로 인해서 세계가 긴장가운데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러시아의 침공이 일어나지 않도록 외교적, 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보면 이러한 갈등은 늘 존재했습니다. 나라 간의 전쟁, 인종간의 갈등, 사회 계층 간의 갈등이 있었고, 그런 갈등으로 인해 폭력을 행사하고, 테러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인류 역사를 보면서 '문명과 전쟁' War in Human Civilization 의 저자 아자 가트 는 “전쟁은 우리의 환경이었고, 우리의 역사였으며, 우리가 살아왔던 곳이었다.” “War was our condition and our history, the place we had to live in.”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 천지를 만드실 때에 전쟁의 역사를 쓰시고자 하신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다 창조하신 마지막 날, 모든 피조물들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각 날마다 만드신 것들도 좋았지만, 이러한 만든 것들이 서로 함께 있는 모습이 참 조화롭고 아름다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에덴이라는 동산을 만드셔서 모든 창조물들이 평화의 관계속에서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덴’이란 단어의 뜻은 ‘즐거움, 기쁨’ 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사는 생물들이 즐겁고 기쁘게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즐거운 삶의 기초에는 좋은 관계가 필요합니다. 천지 창조의 아름다움은 관계의 아름다움속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들이 서로 갈등하며 싸웠다면 그곳에서 사는 것이 즐겁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좋게 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땅에 사는 피조물들을 향해 주신 명령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생물들을 만드신 다음에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모든 채소와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너에게 주니 그것을 먹도록 하라” 고 하십니다. 육식을 좋아하시는 분은 놀라시겠지만 에덴 동산에서는 채식만 해야 했습니다. 이는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짐승, 하늘의 새, 그리고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도 무엇을 먹고 살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짐승들이 푸른 풀을 먹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먹을 거리가 뭐가 그리 중요한지,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땅에 사는 동물들에게 먹을 것까지 지정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물들 간에 관계가 어떠해야 함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들에게 풀을 먹게 하심으로, 먹고 살기 위해 다른 동물을 해하지 않고, 풀을 뜯으면서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관계로 만드셨습니다.
에덴 동산은, 힘이 센 존재가 약한 것을 괴롭히거나 잡아 먹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똑똑하다고 그렇지 못한 존재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산다고 하면 이상하다고 여기며 화제거리가 되겠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는 그것이 정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들이 싸움도 없고 해함도 없이 풀을 뜯으며 사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 온 이후에 모든 것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가장 먼저 훼손되는 것이 관계성입니다. 창조물들의 외적인 모습은 변함이 없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에덴동산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에덴동산을 주셨지만 처음 사람들은 그 동산을 지켜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의 나라, 에덴이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가정, 교회, 이 사회가 에덴동산과 같은 첫 창조의 모습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에덴 동산에서의 삶을 어떻게 지키며 누릴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에덴동산에서의 삶은 동산 중앙의 두 나무를 범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담과 하와가 누릴 수 있도록 하셨고 모든 채소와 모든 열매맺는 나무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동산 나무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었고, 짐승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지 않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두 나무를 세우시고 이 나무들의 열매는 먹지말라고 금하셨습니다. 만약 그 열매를 먹게 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두 나무는 생명나무과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위험한 나무를 숨기지 않으시고 모든 생물들이 다 볼 수 있는 동산 중앙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피조물들에게 알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지만 이 두 나무는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이 두 나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줍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에 생명을 주시기도 하시고 가져가시기도 하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이 선과 악의 기준임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모든 선악의 판단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옳고 그름을 가지고 싸우고 전쟁을 치룬다고 할지라도, 유일한 선악의 기준과 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마가복음 10:18절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꿇어 앉아 질문을 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의 질문에 답하기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렇다고 예수님이 선하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선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선함의 근거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선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람 자체가 선함을 분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이 선한지를 알려 주시고, 그대로 살아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선과 악의 기준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 두가지 영역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허락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셨습니다.
이를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이 에덴의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고,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생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삽니다. 중국의 시황제는 영생하기 위해 불노초를 찾아 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과학의 힘을 빌어, 오래 살아보고자 열심히 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에덴의 삶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악의 기준임을 믿고, 그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싸우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은 내 생명의 주인이야, 하나님은 모든 선의 기준이야" 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하나님되심을 지켜드리는 자가 에덴에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가장 먼저 부인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뱀입니다.
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입니다. 그런데 그 뱀을 묘사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간교’는 히브리어로 아룸(arum)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나쁜 의미에서 ‘간교하다’,’ 교활하다.’ 입니다. 그런데 좋은 의미로는 ‘영리한’ , ‘슬기로운’ 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들짐승보다 뱀을 좀 더 똑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그 똑똑함을 가지고 악하게 사용합니다. 뱀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어느날 뱀이 여자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한가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똑똑한 뱀이 이를 몰라서 묻습니까? 아닙니다. 의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이를 모르고 말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
그런데 뱀이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이야.”
그 말을 들은 하와가 선악과 열매를 보니까 얼마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는지 그것을 따먹고, 남편 아담에게도 줍니다.
하와가 뱀에게 속아 넘어간 이유가 있습니다. 하와에게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뱀이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질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자신이 하나님과 될 수 있다는 말에 유혹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뱀이 하나님의 말씀과 정 반대의 주장을 했을 때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욱 믿었습니다. 뱀의 말이 틀리면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먹고 죽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창조주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할 수 없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뱀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부인한 존재입니다. 뱀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주어진 다스림의 권를 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만드실 때에 누구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로 만드셨나요?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생물들을 만드신 후에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그러니까 뱀은 아담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끌고 가십니다. 그리고 아담은 그 각 생물을 불렀는데 그것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뱀’이라고 하는 이름도 아담과 하와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런데 뱀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거짓으로 다스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부인하도록 속여 버립니다.
어떤 분들은 농담삼아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하와가 한국사람이었다면 절대 뱀은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남편 아담을 몸보신시킨다고 그 뱀을 잡아서 뱀탕을 해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내 안에서 주인 노릇하려고 하는 뱀을 잡아 먹어야 합니다. 뱀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주장을 가지고 나올 때에 그 말에 호응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 피조물인 네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다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해! 하나님께 이르기 전에 썩 저리로 꺼져”
그런데 이러한 일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뱀의 말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생명을 주장하고, 내가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뱀을 제거해야 합니다.
3.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들 안에 있는 뱀과 같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정말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그들의 벗은 모습이 부끄러움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들은 하나님이 두려워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숲으로 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숨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니 하나님이 두려웠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편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를 물으니 아담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담겨져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 하와에게 잘못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와는 어떻습니까?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역시 자신의 잘못을 뱀에게 책임을 전가 합니다. 그리고 뱀도 저주를 받아 평생 흙에서 기며 흙을 먹고 사는 존재가 됩니다.
무엇보다 여인의 자손과 뱀은 서로가 원수 관계가 됩니다. 여자의 후손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풀을 뜯고 평화로워야 할 사람과 뱀의 관계가 원수의 관계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에덴에 머물지 못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아담과 하와의 행동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아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선악을 구분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물으실 때에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여기는 독선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토록 좋게 보셨던 에덴동산에서 아름다운 관계들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평화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에덴동산의 모습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에덴동산의 회복을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11장에 보면, 앞으로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는데, 11:6-9절에,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은 에덴 동산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평화의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지도 말씀하십니다. 9절에,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에덴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제대로 알고 그 지식으로 살아갈 때에 에덴을 삽니다. 무지하면 뱀의 거짓된 말에 속습니다. 그리고 에덴을 잃어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의 삶에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사람, 이 땅의 자연들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들과, 교회, 이 사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에덴동산의 기쁨을 우리의 삶속에서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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