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0/2022 -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태복음 21:1-11] - 종려주일
https://youtu.be/amiI0Hf912w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나무 중에 하나입니다. 야자나무하고 비슷한데 대추같은 열매가 열립니다. 그래서 대추야자나무라고도 합니다. 종려나무는 ‘승리, 번영, 영광’을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실 때에, 사람들이 이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날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보내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매년 절기를 지키시러 예루살렘에 오셨지만, 이번에는 그 전과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직접 유월절의 속죄제물이 되고자 예루살렘에 오시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번씩이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이시지만, 예루살렘에 가시면 많은 고난을 받고 가장 고통스럽게 죽으실텐데, 예루살렘성을 들어가시고자 하실 때에 얼마나 두려우셨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준비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가지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십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자 둘이 예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나귀를 풀어 오려는데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대로 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그랬더니 그들이 나귀를 내어주고,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서 옵니다.
나귀의 임자들은 ‘주인이 쓰시겠다.’ 라는 말씀 한 마디에 아무런 대꾸없이 나귀를 제자들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곧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여겼기에, 자신의 나귀도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쓰시도록 드려야 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내어드리는 것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의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전능하신 주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서 쓰임받는 존재가 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에 유능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많은 일로 쓰임받았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 쓰임받지 못하였다면 그 인생은 허무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귀가 예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귀를 어떻게 쓰시고자 하셨습니까? 어떻게 쓰임받는 것이 가치있는 삶이겠습니까?
1. 나귀는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시고, 메시야임을 드러내도록 쓰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로 나귀를 끌고 온 제자들은 그 위에 겉옷을 얹었고,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신 것은 단순히 걷는 것이 힘들거나 걷기 싫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럴 목적이셨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나귀 새끼를 타시지 않고, 힘이 세고 멋지게 생긴 말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끼 나귀 시승을 위한 용도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는데 도구로 쓰임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환대했던 것은 바로 그가 타신 나귀를 보고,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 왕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9:9절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 오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야, 곧 구세주가 오실 것을 기다려왔습니다. 특별히 나라가 위기가운데 있을 때는 더욱 메시야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에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때에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오시길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가 500여년 전에 예언했던 그 모습대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가 자신들 눈앞에 나타나셨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 바닥에 깔고, 종려나무가지를 꺽어 흔들며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종려나무는 그 당시 왕들이 승리하고 입성했을 때에 흔들었습니다. 종려나무의 의미는 “승리, 영광, 번영”입니다. 종려나무를 흔드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할 승리의 왕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나귀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는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사람을 한번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귀새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람을 태워본 경험도 없는 나귀새끼를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당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십니다. 건장하고 힘이 센, 경력이 많은 나귀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한번도 사람을 태운 경력이 없는 연약하고 미숙한 새끼 나귀도 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그 모습 그대로를 아시고,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약하고 부족하다고 해서 위축될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쓰임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겸손하지 못하면 도리어 자신의 강함과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과 대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나귀는 메시야의 겸손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받았습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주인이 주신 짐을 지기 위해 무릎을 꿇고 겸손히 그 짐을 받는 나귀의 모습이, 겸손하신 왕을 나타내기에 적합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왕으로 나타내시고자 나귀 만을 쓰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에 무리들이 예수님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우리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호쉬아나’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연이어 부르는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 있던 바리새인들 중에는 그 소리 듣기가 싫었는지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눅 19:40)
지금 사람들이 외치는 호산나 외침은 사람들이 하지 아니하면 돌들이라고 외쳐야 하는 외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향하여서 예수님 당신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 구원자임을 널리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만을 당신이 왕이고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드는 종려나무가지도 예수님이 승리의 왕임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할 왕임을 선포케 하신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외치지 않으면 예수님은 돌들까지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께서 쓰시고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됨을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서 우리는 호산나 외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한번 주님을 향하여 주님이 구원자되심을 고백하며 외쳐 볼까요?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따랐지만, 안타깝게도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라고 외치지를 못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을 위기에 처하게 할 위험인물로 생각되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할 왕으로 외치는 것은 정치적으로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들의 왕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황제는 티베리우스(AD14-37)였고, 이스라엘이 섬길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황제는 각 지역에 분봉왕을 세워서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황제가 세운 왕도 아닌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에서 이를 로마에 대적하는 민란으로 여긴다면, 이스라엘은 커다란 어려움을 당합니다. 로마제국은 보통 식민지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로마제국을 대적해서 반란하는 것은 엄격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할 왕이라며,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것은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멸망을 당할 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호산나 외침을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는 구원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자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의 왕이 되심을 잘못아는 것은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그 사람들도 예수님이 로마제국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했기 때문입니다.
3.예수님께서 세상에 알리시고자 하시는 구원자 되심은 무엇입니까? 이 땅 가운데 임해야 할 진정한 구원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치르면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국민들이 우크라이나를 구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각종 국제 모임에서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알리며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도와 주고 구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먹고 입을 것보다 무기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세계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호산나” 를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셔서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왕과 같은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재건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은 로마제국을 무력으로 공격하며 그들을 물리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로마병정의 손에 죽으셨습니다. 가장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사람들을 살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모든 이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죄의 지배를 받는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죄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을 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풍요롭고 똑똑하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육신이 건강하고 자유하다고 할지라도, 그 육신으로 죄에 종노릇한다면 그 육신의 구원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것들을 향하여 호산나 외치라고 속입니다. 강력한 로마제국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호산나’ 외치라고 합니다. 사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과 재물과 권력 등을 향하여 호산나 외치며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에 호산나를 외쳐봤자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멸망시킬 것을 향하여 ‘호산나’ 외칠 때에, 성도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 만이 진정한 우리의 구원임을 믿으며,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외치며 주님이 구원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당신이 이 땅을 구원할 왕으로 오셨음을 사람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새끼 나귀를 통해, 종려나무가지를 통해, 그리고 사람들이 외치는 호산나 구호를 통해서 이를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 땅에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며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죄의 사망에서부터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외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일어나는 삶의 문제를 가지고 또한 주님께 호산나 외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 일어나는 미움과 싸움, 폭력, 차별, 등은 죄로 인한 현상들입니다. 이러한 죄의 문제로부터 구원받을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권력과 재물, 사람, 더 큰 폭력이 내 구원자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무기력한 분이 나의 영혼을 구하고, 이 세상을 죄악으로부터 구할 유일한 분임을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 안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삶에 죽을 것 같은 순간에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외침으로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또한 주님의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는 나귀와 같은 존재로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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