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7/2022 - 나는 어떤 자루인가? [마태복음 9:14-17]
https://youtu.be/I5v-qUmmVpI
제가 어릴 때에 부모님은 벼농사를 하셨는데, 가을에 추수를 한 다음에는 벼를 잘 말려서 정부미 포대에 넣습니다. 그런데 벼를 포대에 담기 전에 꼭 확인하는 것이 포대에 구멍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포대는 전년도에 쓰던 것을 재활용하는데 간혹 구멍이 난 포대가 있습니다. 쌀포대를 운반할 때 갈고리로 포대를 찍어 나르는데 그 때 포대에 구멍이 나기도 합니다. 아니면 쥐가 벼를 먹겠다고 구멍을 뚫어놓은 것도 있습니다. 포대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으면, 그 구멍으로 벼알이 줄줄 세어 나옵니다.
물건에 따라서 그것을 담을 적합한 용기를 사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큰 봉투가 없다고 큰 물건을 작은 봉투에 억지로 담으려고 하다가 보면 봉투가 찢어집니다. 종이 봉투에는 마른 물건만 넣어야지, 생선과 같은 젖은 물건을 넣었다가는 봉투가 찢어져서 낭패를 보게 되니다. 우리 교회 부엌에 보면 김치 빈병들이 많이 있는데, 김치는 유리병에 담아서 파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새 포도주를 어디에 담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담아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내 안에 잘 담아내는 자루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잘 담아 낼 때에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자루는 터지게 되고, 새포도주는 쏟아져 버려서, 포도주가 주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품는 자루가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져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하실 때에 주신 답변 중에 하나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이 참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경건의 모습인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며 모여다니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를 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엄격하게 행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 규칙적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해야 되는 절기에는 추가적으로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할 때에는 티가 나게 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할 때는 수염과 머리를 손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식하는 바리새인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고,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존경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역시 바리새인들은 우리와는 급이 다른 경건한 분들이야~”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금욕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 사가랴는 주의 사자를 통하여 요한이 어떠한 존재로 태어날 것을 듣습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 1:15). 요한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택함받은 나실인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천사의 말씀을 따라 나실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7:33절에 사람들이 요한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세례요한은 커서도 나실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스승을 따라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고, 금식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으니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의 질문을 들으시고, 반문을 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대답은 뻔하지 않습니까? 혼인집에서 슬퍼하며 금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혼인집 처럼 즐거움이 있는 곳이 어디있겠습니까? 혼인집에 있는 사람들은 신랑과 신부를 축하하며 그들과 함께 기쁨을 누립니다. 혼인집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음식이 있는데 그것은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혼인집에서는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혼인집 손님’이라고 번역된 사람들은 ‘신랑의 친구’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7일간 지속되는 결혼잔치에 신랑과 함께 하며 그 잔치의 기쁨을 함께 누립니다. 그리고 잔치 마지막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들러리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신랑과 함께 하는 친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제자들은 혼인집에서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기쁨이 누려야 되기 때문에, 슬퍼하며 금식할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쁠때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경험했을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도 고통과 슬픔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슬픔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달을 때에, 위로를 받고, 도리어 기쁨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 3절에 보면,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궁궐에 있다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할 때에 경험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기쁨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기쁨이 사라질 때에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2.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금식(슬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모함에 빠져서 십자가에서 죽게 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고 금식할 시간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슬퍼하며 금식할 때는 바로 예수님을 빼앗겼을 때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때에 금식하며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3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그의 시 1절을 보면, 그는 탄식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 나이까” 다윗에게 있어서 절망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슬픔과 탄식 가운데 다윗이 간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다윗은 자신의 눈을 밝혀달라고 간구합니다. 다윗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지 않는 것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심을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신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고 하나님이 안 계십니까? 아닌 것입니다. 단지 내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깨닫지 못하니 슬픔과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시를 어떻게 마치는지 아십니까?
13:5-6절에, “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결국 하나님이 안계신 것 같아서 탄식하지만, 결국 그분이 함께 하심을 믿고 찬송가운데 그 시를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환경이 변화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속에 슬픔과 탄식이 있습니까? 그 때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슬픔과 탄식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빼앗기는 때에 금식할 때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또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함을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신랑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함을 깨닫고, 그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기쁨가운데 믿음생활할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슬픔과 탄식이 많은 세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담을 수 있을 만한 자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먼저 옷을 기우는 예를 드십니다. 예수님은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그 이유는 기운 것이 낡은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옷을 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식입니다.
옛날에 부모님께서 아이들에게 옷을 사주실 때에 현재 아이의 크기보다 좀 더 큰 치수를 사셨습니다. 아이들이 빨리 자라기 때문에 오래 입히려고 그렇게 하셨지만, 또한 옷을 빨아서 말리면 옷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더 심했을 것입니다. 생베조각을 헌 옷에다가 꿰메면 처음에는 좋아보였지만, 그 옷을 빨아 말리면, 생베조각이 줄어들어서 헌옷과 꿰맨 곳이 뜯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옷을 망쳐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예를 드십니다.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죽부대는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서 목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기워서 만듭니다. 그런데 새 가죽으로 만든 부대는 신축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담겨진 내용물이 발효가 되더라도 가죽도 같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 내용물과 부대가 안전하게 보관됩니다.
그런데 헌 가죽부대에 새포도주를 넣으면 난리가 납니다. 헌 가죽부대는 신축성을 잃어 버리고 굳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부어 넣으면 얼마 있다가 포도주가 발효를 하면서 팽창하게 되는데, 딱딱하게 굳어진 헌 부대는 이를 버티지 못하고 터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대 안에 포도주도 쏟아지게 되고, 그 부대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새 포도주를 새가죽부대에 넣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 우리의 신앙생활속에서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모시며 기쁨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을 담아낼만한 부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안에 거하실 때에 그냥 평안히 머물러 계시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 새 포도주와 같이 팽창하며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형태로 우리안에 거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그냥 있지를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4:12절과 같이,”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의 말씀대로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말씀대로 변화되어지는 새 가죽부대가 될 때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발효하는 포도주를 담아내는 새부대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새포도주와 같이 팽창하며 나에게 변화의 압력을 가합니다. 그 때에 가죽부대가 해야 하는 일은 포도주가 팽창하는 것을 막고 내 고집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포도주가 팽창하듯이 부대도 같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삶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맞추어서 변화될 때에, 우리는 주님을 모신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며, 제자로서 성숙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며 버티는 굳은 가죽부대의 모습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음껏 변화시킬 수 있도록 내 자신을 예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변화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의 변화의 고통은 예수님을 모신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혼인집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생활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쁨을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담아낼 만한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할 때에 예수님은 새 포도주와 같이 운동하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그 때에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말씀에 따라 신축성있게 변화되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고집대로 버티다가 보면, 결국 부대가 터지고, 포도주가 쏟아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담아낼 수 있는 부대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능력을 경험하며, 주님을 모신 삶이 어떤지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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