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7/2014 -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자 [이사야 53:2-5]
오늘은 대림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대림절 두 번째 초를 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초가 소망을 의미하고, 두번째 초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뜻합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평화를 말하고 나름대로 그 평화를 누리면서 지내는 시기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은 비교적 오랜 동안 평화를 누렸던 시기가 있었고, 그들이 누렸던 평화를 가리켜 “팍스 로마나, 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라고 말합니다. 이 때에 로마는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비교적 오랜 시간 평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라고 하지만, 실제로 식민지 사람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로마의 폭력과 착취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또한 로마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수 많은 노예들은 평화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억압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로마의 평화는 모든 이들을 위한 참다운 평화가
아니라, 일부를 위한 거짓된 평화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로마 시대에,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서 또 한 분을 보내주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면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9: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평화가 너희의
눈에 가리워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평화의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평화의 길이 있는데도 그 눈이 가리워져서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평화의 소식보다는 전쟁과 다툼의 소리가 더 요란합니다. 이스라엘과 중동 이슬람 국가간의 전쟁이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미국도
그 전쟁에 개입되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사회도 그렇습니다. 며칠 전 뉴욕에서
경찰관이 시민을 제압하려고 목을 졸랐다가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해를
한 경찰관이 무기소처분을 받은 것으로 인해서 뉴욕에서는 며칠째 사람들의 시위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에도 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습격하는 바람에 안전하지 못한 곳이 되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 가정폭력 등으로 인해서 오늘날 가정 안에 여러 문제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렸던 평화도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대림절기를 맞으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를 말씀을 통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께서
평화를 추구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화목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1:6-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평화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희 집, 뒷 마당에는 전에 사시던
사모님께서 일구시던 조그마한 텃밭이 있습니다. 제 아내도 그 텃밭에 채소를 심어 먹곤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아내가 비명을 지르면서 흥분해서 집으로 들어오는데, 텃밭에
뱀이 있다는 것입니다. 잡초들을 베어 모아놓은 잡초더미를 들추었는데 뱀의 꼬리가 꿈틀대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에 “가든 스네이크”를
봤던터라 작은 뱀이 나타났나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큰 뱀이니까 조심하라고 해서 저는 기다란
쇠 파이프를 가지고서 텃밭에 갔습니다. 좀 긴장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그 잡초 덤불을 들추는데 가느다란 뱀의 꼬리가 나오더라구요. 작은 뱀이려니 하고서 쇠파이프로 그 꼬리를
건드렸더니 뭔가 큰 것이 꿈틀대는 것 같아서 꼬리를 따라서 덤불을 들추니까 일미터가 넘는 빨강과 검정색이 썩인 뱀이 있더라구요. 쇠막대기로 머리를 쳐서 뱀을 죽였는데도 그게 꺼림직하더라구요. 그걸
보면서 정말 뱀하고는 친해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루실 평화의 모습을 보면 그 관계들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사자가 그 발톱을 쓰고 날카로운 잇발을 사용해서 소를 잡아 먹지 않고,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사자가 다른 동물을 잡아 먹는 것은 본성입니다. 뱀이 사람을 무는 것은 악한 본성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악한 본성까지도
변하여서 함께 평화를 이루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이사야 11:9절에,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였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이루어집니다.
곧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 안에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통해서 사람과 짐승들의 싸움의 본성, 불화의 본성이 변화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진정한 변화가 없고, 진정한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이
죄인된 사람들과 평화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와서 평화를 회복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없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평화를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죄로 인한 불화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이 땅에
평화의 중보자로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도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해하는 것에 관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이 땅에만 평화를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도 평화를 주신 분입니다.
누가복음 19:38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제자들이 보면서 찬양하기를 “주의
이름 오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였습니다. 이 땅의 평화를 말하기 전에 하늘에 평화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평화를 가져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그 징계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 죄를 지은 사람이 받아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그 징계를 받으심으로,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그 대가를 치르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하나님과 저와 여러분들의 관계를 평화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자리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자리, 화목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3.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이루신 하나님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평화의 중보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평화케 하는 일에 헌신하였던 분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저와 여러분의
몫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5: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싸움을 만들고 불화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싸움꾼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화목케 하는 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입니까?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사야 말씀에는 또 다른 평화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2:4절에,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나라가 칼과 창을 만드는데 분주합니다. 일제시대 때에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를 때에 전쟁을 만들기
위해서 조선사람들의 밥그릇, 남비와 솥, 심지어 교회의 종까지
떼어서 그것을 가지고 무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나라가 전쟁을 대비하며 무기를 만들고
있고, 각 개인들도 다른 이들을 향해 칼과 창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은 다른 것입니다. 이제는
그 무기를 가지고 쳐서, 보습을 만들고 낫을 만드는 것입니다. 보습이라고
하면 땅을 가는 쟁기를 말합니다. 쟁기와 낫으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전쟁 기간에는 농사짓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없을 때에 평화가운데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꿈꾸며 보습과 낫을 준비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칼과 창을 만들어 다른 이들을 공격하고 해함을 주려는데 열심을 냅니다. 로마의 평화와 같이 그렇게 해서 평화를 얻으려고 합니다. 네가 먼저
칼과 창을 내려 놓으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며 서로 무기를 움켜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내 안에 다른 이들을 공격하려고 하는 칼과 창을 먼저 내려 놓고
쳐서 보습을 만들고 낫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징계를 받음으로 다른 이들이 평화를
누렸던 것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 평화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평화의 도구로 사용되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싸우고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코 신부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담아서, “평화의
도구”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게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대림절 기간에 성 프란시스의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회복되어지고 누려지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그 평화를 우리가 누리며 더욱 거룩하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화의 열매임을 우리는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방법 중에 하나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중간에서 서로를 중보하는 중보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세웠던 칼과 창을 내려놓고, 그것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낫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이루신 평화가 숨겨지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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