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1/2015 - 부족한 한 가지 [마태복음 19:16-26]
오늘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심각한 질문을 가지고 찾아 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을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관원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공무원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20절과 22절에 보면, 그 관원이 청년이었고, 재산이 많은 부자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영생에 관해서 질문을 가지고 온 그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사회적인 지위도 좋았고,
재물도 풍족하게 소유한 성공했다고 일컬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삶에는 문제가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민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부자 청년의 세상적인 삶은 만족할 만한 풍요로운 삶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평안함이
없고 불안했습니다. 구원의 확신 없이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나름대로 영생을 얻고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열심히 계명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청년을 보시고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나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서, 혹시나 우리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실 우리에게 부족한 한 가지가 있는지를 살피고,
어떠한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을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영생은 사람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를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청년이 예수님께 한 질문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청년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 자신을 지키던 간수에게 한 대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임을 믿고서 그 분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영생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부자청년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보다는,
의롭고 선한 율법적인 행위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의
질문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합니다.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더 필요한 선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까지의 선한 행위가 영생을 얻기에 충분하다는
칭찬과 인정의 소리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질문에 먼저 몇 가지 율법적인 계명을 말씀해 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느냐? 물으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청년은 이것을 어려서부터 모두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바로 그 부족한 것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고 그 후에 나를 좇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핵심은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좇을 때에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6절에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좇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좇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여 버릴
때에 비로서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을 보실 때에 겉으로는 모든 것이 풍족하게 보였지만, 도리어 부족함을 느끼셨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풍요함이 도리어 예수님을 따르기에 방해하는 부족한 한가지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물건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영생을 위해서 행해야 할 선한 일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부자였으니 그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보통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재산을 다 정리한
이후에 자신의 형편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구제를 받아야 할 거지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냥 부자인 채로 예수님을 따라오라고 하면 좋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그 물질을 포기하고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청년을 근심하게 했고, 예수님을
떠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물질의 삶도 풍요하다고 하면 예수님 잘 믿겠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물질적인 삶을 손해본다고
하면 과연 물질을 따라 가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의 해답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더욱 심난해서 걱정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이 영생을 얻기에 한 가지 부족한 점으로,
자신의 가진 물질을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상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만 포기한다면
예수님을 좇을 수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기가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부자청년에게 있었던 부족한 한 가지였던 것입니다. 2.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부자청년과 비슷한 처지에 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근심하고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기에 부족한 그 한 가지를 포기하고, 기쁨으로 예수님을 쫓겠다고 자원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부자가 된 것은
앞의 부자 청년이 부자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리들은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습니다.
자신의 동족들에게 필요이상으로 세금을 거둬 들였습니다. 거둬들인 세금으로 로마 정부에다가
바칠 것은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으니 얼마나 물질에 집착해서
살아 부자가 됐는지를 알만 합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동족에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불의하게 모은 돈으로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에게도 부자청년과 같은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삶은 풍요하지만, 영적으로는 역시나 곤고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이 동네에 오신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길거리로 삭개오도 나갔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사람들 속에 묻혀서 도저히 예수님을 볼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근처에 있는 뽕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그 예수님께서
자신이 있는 뽕나무까지 오셔서 그 위에 있는 자신을 올려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고 하십니다. 삭개오는
기쁨으로 예수님을 자신에 집에 모시고 풍성한 음식으로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께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삭개오는
그 때에 자신이 집착하고 있었던 그 물질들이 자신의 삶에 문제가 되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거룩하신 분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자 할 때에, 자신의 집이 예수님께서 거하시기에 얼마나 부끄럽고 죄가운데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신의 물질적인 집착과 불의함을 비워버렸던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에게 부족한 한 가지였던 바로 물질에 얽매였던 자신을 기쁜 마음으로 포기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영광스럽게 모시고 유숙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까지 움켜쥐고 있었던 부자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는데, 도리어 그 동안 악착같이 쥐고 있었던 자신의 재산을
버리고 예수님을 모신 삭개오는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풍족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풍족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언제든지 비어 놓을 수 있을 때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부족한 한 가지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모셨을 때에 삭개오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있도다.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구원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영생의 확증을 주신 것입니다. 그
동안 선한 일 제대로 해 본적이 없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시기에 방해가 되는 불의와 죄된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모셨을 때에, 그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만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3.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 걸림돌이 되는, '부족한 한 가지'가 저마다 있습니다. 부자
청년 같은 경우에는 물질이 그것이지만,
어떤 분들은 물질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별 문제가 아닌 분들도 계십니다. 자신이 가진
물질을 가지고 충성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물질이 풍성하든지 없던지 상관이 없으십니다. 어떤
분들은 명예와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잘 좇지 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분은 삶의 게으름으로 예수님을 잘 좇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세상의 자랑과 허영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좇지 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자신의 성격이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자신의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좇아가기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기에 부족한 것 한 가지를 지적 받았지만, 예수님께서 저를
보시고 지적하신다면 한 가지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형편에 있는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적하실 그 부족한 것을 제대로 깨닫고, 빨리 비울 때에 우리 주님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비우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을 믿고 따름에 있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따름을 막고 있는 것에 대해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버렸어도, 나머지 한가지를 제대로 버리지 못하고 그것까지 포기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르기가 힘이 듭니다. 청년
같은 경우에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재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것이 그를 근심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서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좇기에 방해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끝까지 좇아가기를 각오하고 나서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적당히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지난 1월 18일 SNS(카톡)를 통해서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들로부터 긴급 기도요청 메시지가 퍼졌습니다. 저도 그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니제르의
이슬람 교도들이 교회와 성당을 불지르고,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색출해서 박해를 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슬림들의 폭력은
1월 16일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샤를리 에브도를
발행하는 회사를 무장한 무슬림들이 테러한 것과 연관이 됩니다. 샤를리 에브도 (Charlie
Hebdo)는 주간 풍자 신문인데 그 동안 마호멧을 풍자하는 그림과 글을 실었는데 그러한 행위가 무슬림들의 타켓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테러 이후에 유럽 쪽에서는 이슬람을 비판하는 집회가 열렸는데, 반대로 무슬림이 많은 아프리카 나라 중, 니제르 무슬림들은 샤를리 에브도를 규탄하는 집회를
하면서, 동시에 그곳에 있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무슬림들은 "Allahu Akbar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소리를 지르면서 교회에 불을 질렀고,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학교와 가정에 돌을 던지며
공격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하는 그들에게 그러한 어려움과 위험을 주시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 마지막 한 가지까지도 부족함 없이 그 목숨까지도 버려야 할 때가 있다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마지막 한가지라도 부족함 없이 다 내어주시고, 스스로를 비우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0:17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 목숨을 버림으로 다시 영생을
얻으셨던 것과 같이, 저와 여러분들이 버리는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귀한 하늘의 보화가 되고 생명이 되어서 우리에게 상급으로 돌아올 줄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부자청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명확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간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버림과 비움의 삶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도리어 반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풍요하고 건강하고 잘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다가 뭔가 손해를 본다거나,
자신이 원하는데로 되지 않을 때에는 도리어 시험에 들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서 점차 낙오가 되고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는 버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내게 걸림돌이 되는 세상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취하고,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영광을 취하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설령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를 따르기만 한다면 참된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동안도 주님을 위해서 많은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으신 줄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도 나를 버리고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비인 자리에 영생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차지하시고,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한 영적인 삶을 경험할 수 있고, 이 땅에서도
그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그 한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를 살피시면서,
근심과 염려 가운데서 사는 삶이 아니라, 삭개오와 같이 주님으로 채움받아 구원의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샘터질문 1.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서 집착하거나 고집하던 것을 비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을 비웠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었나요? 2. 부자청년과 같이, 주님께서 지적하실 만한 부족한 것 한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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