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1/2015 성령의 충만함 [사도행전 2:1-4]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이었고, 성령님은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에 꼭 필요한 분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 대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그 믿음과 구원의 상태를 가지고 죽을 때까지 끝까지 살아가기에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다스릴 수 없고,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연약한 우리에게 진리로 분별케 해주시고, 그 분별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해서 구원에 이르기까지 인도해 주실 분으로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꼭 필요한 것이 믿음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서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전파했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로 그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야다.”라고 전파했습니다. 그럴 때에 이 말을 듣고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
베드로가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님을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했는데, 성령님께서 선물을 주시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또한 성령자체가 선물이 되어서 우리에게 주신바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 죄사함을 받은 후에 받는 것이 성령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전만큼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습니다.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좀 특별한 일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 교회와 성도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경험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고 능력의 영이 우리 안에 있지 않으니까 때로 거짓에 속으면서도 모르고, 능력이 아니라 무기력 가운데서 믿음생활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은 우리 믿음생활 가운데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고, 어떻게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을 받는 다는 것이 낯설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미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을 제대로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의 인간적인 지혜로 그 진리의 말씀이 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를 알려 주셨는데 누구를 통해서 알려주십니까? 바로 거룩한 진리의 성령님을 통해서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말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지혜를 가지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깨달아서 믿은 것 같지만, 이미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시인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임재가 있으면, 예수님의 구세주되심, 하나님이 계심이 믿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알고 보면 그렇게 낯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님의 활동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해서 예배드리게 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된다고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시고 도전을 주시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2. 그런데 또 성령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이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깨닫고 믿지만, 많은 성도의 삶이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내가 주인이 되어서 그 믿음의 고백과는 다르게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내 안에 내가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직까지 내가 주인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점령하시게 되면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대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을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육신의 배부름과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면 이제는 성령님의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술취함의 충만을 받은 것이 참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다음에 밖에 나와서 방언으로 말할 때에 사람들이 이들이 낮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술의 충만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이성은 마비가 되고 술이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합니다. 술 취해서 술이 말하게 하는 방언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창피한 것도 없고 그냥 술에 취해서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도 그렇습니다. 이제 거룩한 영에 취하게 되면, 이제는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주장하시는 대로 진리와 생명의 말을 하고, 성령이 행하게 하심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성령충만의 자리로 나오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고 위기가 있을 때에 술 취하기 위해서 술자리를 찾지만, 성도들은 그럴 때에 성령충만을 위해서 주님 앞으로 나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적당히 믿고 적당하게 믿음생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운데 있는 육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이러한 성령님을 우리는 어떻게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성령님을 우리가 받기 위해서는 사모하는 심령을 가지고 구해야 합니다.
먼저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여 주실 것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다윗 왕 같은 경우에도 늘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시편 42:1-2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한국 사람들에게 사슴이 물을 마시는 장면을 연상하라고 한다면 깊은 산속에 있는 옹달샘에서 여유있게 물을 마시는 장면이 연상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초원에서 목이 말라 타 들어가는 사슴입니다. 물이 못 마시면 죽을 것 같아서 그 메마른 광야를 헤매면서 간절히 시냇물을 찾는 사슴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그 어떤 사람들을 사모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보기를 갈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평상시에도 하나님을 보시를 사모하였고, 위기가 있을 때에는 더욱 간절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사실 언제 성령님이 올 것이라고 예고하지는 않으셨지만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성령님을 받자고 다 같은 뜻을 가지고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모였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중고등부 학생 시절에 성령을 체험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유스그룹이 함께 모여서 밤마다 기도하며 은혜를 사모할 때가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난로가 피어 오르고 10여명의 학생들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말씀으로는 들었고 믿지만, 또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체험케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함께 기도를 하면서 아이들 중에 방언을 받는 아이들이 늘어 났습니다. 혀가 꼬인 말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합니다. 어떤 아이는 영서라는 것을 받아서 알아보지도 못하는 글을 기도 중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부럽고 사모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 크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성령님을 체험하게 해 주세요, 방언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가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방언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구하는 것은 단순히 영적인 은사를 경험하고 뭔가 신령해 보이고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받기에 사모한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내려 놓고, 이제 성령님이 개입하시고 도와 주셔서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이끌어 달라고 나를 내려 놓는 일입니다. 나 자신을 그분에게 내려 놓고 맡겨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4. 성령님을 받기 위해서는 사모함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시면서 그 선물을 받을 태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왕 선물로 성령님을 보내 주시기로 하셨으면, 그렇게 사모하며 간절히 구하지 않아도 그냥 믿음 생활하면서 자동적으로 주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편에서도 좋고, 사람 편에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사모하며, 부르짖어 구하는 태도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스테이크 집에 갔을 때에 기억이 납니다. 점원이 우리 일행을 테이블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 앉았습니다. 그랬더니 곧 이어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땅콩을 커다란 바구니에 담아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곳에 음식을 먹으러 오면 주문한 스테이크를 기다리면서 까 먹으라고 자동적으로 땅콩이 서비스로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공짜란 생각에 땅콩이라고 많이 먹어놔야 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실 때에 스테이크 집에 땅콩이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따라오듯이, 성도들이 사모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데 주시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연약한 우리의 믿음생활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고, 성령님의 가치를 알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차고 넘쳐서 성령님의 임재를 찾고 구할 때에 그 분이 임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하셨습니다. 성령님을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시는데, 그렇다고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때에 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의 사도들이 주시면 주시고 말려면 말고의 심정을 가지고 기다렸던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며 부르짖고 간구하여서 그 주시겠다는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이 절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진리와 거짓이 섞여 있고,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이 혼재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거짓과 악을 제대로 분별할 수도 없고, 분별해도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 만이 참된 진리와 선을 분별케 해 주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이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 사람들에 마음에는 성령충만이 아니라, 다른 충만을 원하면서 살 때가 있습니다. 돈 충만, 명예충만, 권력충만, 인기충만, 미움충만, 이기심 충만… 이러한 충만에 성령충만이 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들을 비워 나가고 성령님께 우리의 자리를 비워드릴 때에, 비로서 우리의 심령에 성령충만이 있고, 성령님의 다스리심이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충만은 바라는데, 성령님의 자리를 비워드리지 못해서 성령충만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충만을 위해서는 사모함과 구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그 어느것보다 성령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구하는 삶을 날마다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를 원하시고 이를 준비하신 하나님은, 믿고 구하는 자녀에게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믿고 확신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 교회가 성령님의 소중함을 더욱 더 깨닫고, 그분의 임재를 더욱 사모하며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서, 진리와 능력 가운데서 구원받은 자녀의 삶을 승리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샘터질문
1.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더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2. 왜 성령님이 구원의 여정 가운데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2.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면서 기도하신 적은 언제였습니까? 언제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하다고 느끼십니까?
과제: 성령충만의 성도, 교회가 되기를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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