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5/2015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요한복음 8:1-11]
원래, 예수님 전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과도
같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지음으로 이 세상에 죄가 처음 들어 왔고, 그 이후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이들이 죄로 인해서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녕 죽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정녕 살 길을 사람들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정녕 죽을 죄인”도 “정녕 살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구원하신 구원주로 믿을 때에 비록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인정받고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의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실제적인 의인으로 완벽하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아직도 사람의 죄성으로 인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성자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라도 죄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성자로
불리는 사도 바울도, 자신을 볼 때에 자신 가운데서 강하게 역사하는 죄의 성품들을 보면서 탄식을 했습니다. 로마서
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입니다. 이
탄식은 바울이 예수님 믿기 전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사도로서 살아가면서 한 고백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를
원하지만, 육신으로는 자꾸 죄의 법을 섬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지만 내 안의 죄성으로 인해서 실수하며 죄를 짓고 사는 것이 또한 기독교인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 놓고 나중에 후회하기를
“내가 그 때 왜 그렇게 했을까?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라며 자신의 악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죄성에 대해서 괴로워할
때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죄인을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죄로 인해 애통하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구원받은 자이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을 통해서 일어나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취하여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그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입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가운데다가 세워 놓고서, 이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 정죄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과 대적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죄와 비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들의 태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인은 죄를 짓는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여인을 잔인하게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죄를 지은 그 여인보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러한 죄인을 대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그 여인을 둘러싸고 수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서
그 여인의 부끄러운 죄를 고발하고, 수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에 죄에 대해서 신랄하게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궁극적인
정죄의 대상은 사실, 그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자신들이 법대로 처리하지 아니하고,
굳이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유는 예수를 시험하여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간음한 여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22:22절에,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뻔한 답을 가지고서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데,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예수 또한 율법을 어기는 죄인임을 밝히고 정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동안 예수님이 병든 자들,
어려운 자들, 죄인들을 사랑하여 안식일에도 그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셨던 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 또한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돌로 쳐죽이는 것을 반대한다면,
이 또한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가르침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정죄하고 여인을 향하던 돌을 예수님께 던질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고 말하지만, 그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특성입니다. 사람들을 죄짓게 만들고, 일단 죄를 지으면 그것을 가지고 정죄하며 비난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정죄함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죄에 대해서 취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2. 그런데,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분노하며 정죄하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 줄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하십니다. "너희들이 저 여인을 돌로 칠만한 자격이 있느냐? 너희 자신을 한번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한 말씀으로 인해, 모여 있는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습니다. 돌을 들고 여인을 치고자 했던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가고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서 있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며 심판할 만한 의로운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잘 보는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잘
깨닫지 못하고, 또한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경우는 정당화하고 좋게 미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정죄하는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이
침묵하는 것은 생각이 없어서 이고,
내가 침묵하는 것은 생각이 깊어서이다. 남이 교통신호를 어기면 범법자이고 내가 교통신호를
어기면 잘못된 교통체계의 희생자이다. 결혼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귀면 불륜이고, 내가 그렇게 하면 로맨스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이를 정죄하고 자신의 일은 정당화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글에 이러한 내용이 있어서 몇 가지를 발췌해 보았습니다. 남이
손바닥만한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 경건치 못하기 때문이고, 내가 작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활동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남이 기도를 길게 하면 주책이 없는 까닭이고, 내가 기도를
길게 하는 까닭은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남이 예배에 참석치 않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이고,
내가 예배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는 성숙한 신앙 때문이다. 남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는데...’(마 8:20) 라는 말씀이 생각나고, 내가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네 지경을 넓히리니”(출 34:24)라는 말씀이 떠 오른다.
남이 예배시간에 졸면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 22:46)는 말씀이 생각나고, 내가 졸면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쉽게 정죄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모습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의 성향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러한 지침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누가복음 6:42절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어떤
마을에 다른 사람의 험담을 잘하는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단점과 실수를 그냥 두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들추어내서 소문을 내고 창피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이웃들이 그녀와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친정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역시 그녀는 창가에 앉아 어머니에게 이웃집의 불결함에
대해 험담 했습니다. “엄마, 저 옆집 마당에 빨래 줄을
좀 보세요. 빨랫줄에 널린 옷들이 너무 더럽지 않아요? 어쩜 저걸 빨래라고
했을까? 어떻게 저런 옷을 입고 다닌다지요? 더럽게…”
그러자 그 친정어머니가 그 딸을 보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딸아, 더 자세히 보렴.
이웃집 빨래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너희 집 유리창이 더러운 거야.” 흠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흠과 죄를 정죄할 만한 자격이 사람에게는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있게
다른 이들을 정죄하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부터 먼저 돌로치라고 했을 때에 그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간음한 여인의 죄만 보여서 흥분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비로서 자기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니까
부끄러워서 더 이상 그 여인을 돌로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성전에서 나갔습니다. 어른 뿐만 아니라 나이가 어린 젊은이라고 할지라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누가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심판할 만큼 자신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을 정죄하기 보다는,
그러한 모습을 볼 때의 나의 모습을 살피는 모습이 지혜로운 자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모두 성전마당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간음한 여인과 그리고 그 여인을 유일하게 정죄할 수 있는
죄가 없으신 예수님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그녀를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 여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이
정죄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정죄하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할 수 없는
동일한 죄인이기에 정죄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할 만한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도 그들과 같이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확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47절에,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죄를 몰라서 정죄치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비방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리고 그 여인이 죄가운데 얼마나 힘들어 하고 수치를 당했는지, 얼마나 사망의 권세가 그 여인을
다스리고 있는지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 여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죄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죄의 권세가운데서 눌림 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잘 아셨기에, 도리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심으로 죄의 권세로부터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죄의 용서를 받았지만,
때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용납하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려는 성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도리어 비판하지 말 것을 권면하십니다. 마태복음 7:1-2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마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또한
비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관용하고 온유하게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디도서 3:2절에,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를 볼 때에,
우리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같은 아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죄된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죄됨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용하며 온유함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다른 이를 정죄함으로 자신의 의와 완벽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과 죄됨을 느끼면서 함께 상대방에 대해서 아파하고 품어주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죄와 심판을 받았다고 하면 여기서 살아있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 용서함을
받고 구원에 이른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다른 이들의 부족함과 잘못을 정죄와 비판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악을 이기고, 더욱더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며 하나되는 가정,
그리고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샘터질문: 1. 어떤 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비판)하거나,
정죄(비판)를 당했습니까? 2. 다른 이들을 정죄하거나 정죄를 받을 때에 어떤 마음이 듭니까? 3. 예수님은 죄로 인해 정죄당하는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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