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9/2015 - 영광을 얻을 때 [요한복음 12:20-28]
오늘은
사순절 여섯번째 주일이면서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 잎을 꺾어서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여 맞은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리고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맞이하던 그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념하면서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오시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대대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거리에 있는 종려나무 가지 잎을 꺾어서 흔들고,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오시는 길에 깔고서 예수님을 환영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외치면서 맞습니다.
사람들이 외쳤던 ‘호산나’라는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큰 기대가운데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그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는 장군들을 환영할 때의 사람들이 행하던 일인데,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장군과 같은 존재로 믿고 기대하면서 열렬히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환영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소원대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며, 또한 구원받은
자들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헬라 사람들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헬라인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사람들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헬라인 몇 명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뵙고자 원한다고 전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으로부터 헬라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다는 말씀을 들으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십니다. 갑자기 영광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때”에 대해서 수 차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로부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첫번째 대답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도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드디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헬라인이 오는
것을 보고서 이제 그 때가 다다랐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이 때는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에 따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적대시 하는 사마리아 땅에 가셔서도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대인들이 아닌 헬라인들, 곧 이방사람들이 예수님께 온 것을 보시고, 이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영광스러운
순간이 오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그 동안 “영광을 얻을 때”를 기다리시면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얻으실 영광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영광을 얻을 때를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인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으로부터 인정함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고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출세해서 높아지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인기를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구한
영광은 사람들이 유한한 것처럼, 유한하고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만한 많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모든 영광을 자신이
받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을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영광된 일이고, 또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고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영광된
일들은 하나님께서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하신 소명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영광을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른 이들을 살리는 일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입니다. 성도가 영광되게 여겨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로 사용받는 것 자체가
영광된 일인 줄로 믿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자신이
죽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될 방법을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죄인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영광된 일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는 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추우면 “추워 죽겠다.” 더우면 “더워 죽겠다.” 고 합니다. 몸이 아프면 “아파 죽겠다.” 누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속상하게 하면 “너 때문에 내가 못살아” 합니다. 심지어는 너무 좋은 일이 있어도 뭐라고 말합니까? “정말, 좋아 죽겠다.””우스워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을 일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죽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서도
자기 자신을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27절에도,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하였습니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도 심한 갈등과 괴로움 속에 있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드셨든지 그 동안 이 영광을 얻을 때를 기다리셨는데,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죽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고 싶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가장 강한 적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죽지 못하고 혼자 살고자 하기 때문에 많은 열매를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못하고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리고, 도리어 자기 생명을 이 세상에서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보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더 귀하고, 내 생명보다 다른 이들의 생명이 더 귀한 것임을 깨달을 때에 비로서 나의 생명을 미워하여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아내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늘 불신자인 남편 때문에 불만이었습니다. 남편한테
교회에 가자고 그렇게 권면을 하고 애를 써봤지만 남편은 한번도 아내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자고 할 때마다 요지부동하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서 화가 나서 싸우기 일수였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그러냐?
다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데 한 번 정도는 그냥 따라와 줄 수 있잖아”그러면 남편은
“나는 이대로 살다가 죽으려니까 제발 내버려 둬”라면서 대꾸를 합니다.
남편을 전도하려다가 마음만 상하고 남편이 더욱 미워졌습니다. 남편이 미우니까 남편이
신는 신발만 봐도 화가 나서,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발로 밟아 버립니다. 자기 자신도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 대한 상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아내의 마음속에서 남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그 남편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이후부터 아내는 자신의 자존심을 살리고자 남편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위해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남편이 신는 신을 품에 안고서 제발 이 신을 신고서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죽이고자 애를 썼습니다. 남편이 그 아내의
변화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도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한 알에 밀알이 되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밀알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2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나와 같이 죽자는 말씀입니다. 곧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너희도 다른 이들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생명을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내
목숨을 버리는 것도 힘들지만,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 또한 내 자신을 죽이는 것만큼 힘든 일입니다. 나 자신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니 그것처럼 힘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살아있다고 내 자존심을 살리고 내 입장을 살리려다가, 하나님의 뜻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죽이기 십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뜻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내 자신을 죽일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앞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하나님의 나타나고, 내가 죽어서 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삶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주실 때에 나 자신을 사랑하여서 그 생명을 끝까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을 것을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 죽으면 보통
4개월 후에 열매를 맺게 되는데, 보통 100-125알을 맺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확한 밀알을 뿌리고 수확하고를 5년 정도하게 되면, 100-125억 알을 맺게 되는데 그 양은 200명의 사람이 34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양식이 된다고 합니다. 한
알의 밀알 안에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엄청난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명력은 그 한 알이 썩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질 때에 그 많은 양의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죽으셨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이어받은 밀알로 여기에 살아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같이 누군가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죽어주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까? 그 때는 나를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내 자녀를 살리고, 내 배우자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자 나로 하여금 나를 부인하고 나를 죽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다 죽이고 나 혼자 살아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죽이고 다른 이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내 생명을 주셨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많은 영혼을 살리는 일을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는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을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처럼 존귀한 자가 없고 영광된 자가 없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셔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처럼, 내 자신을
더욱 더 죽이고 부정할 수 있는 사순절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받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샘터질문 1. 당신은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까? 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행하셨던 자기 부정과 죽음은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자존심,억울함, 무시당함, 육신의 생명 등) 3.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떠한 자기 부정의 모습을 행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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