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2015 - 시므온의 기다림 [누가복음 2:25-33]
전통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일로 기념하는 성탄절을 앞 둔 4주간을
대림절로 지킵니다. 대림절, Advent 라는 말은 라틴어로 'Adventus' 곧 'Arrival, 도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대림절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출발하셔서
이 땅에 도착하실 것을 기다리며 보내는 절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메시야의 탄생을 누구보다 애타게 기다리면서 살아 온 사람이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시므온만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렸던
것은 아닙니다. 유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구원자,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서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그러한 메시야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열망하며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메시야가 오셔도 그만 안 오셔도 그만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을 구원하실 메시야의 오심을 늘 사모하고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천년 전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셨지만,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기를 늘 사모하고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또한 이 땅이 끝나는 날,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특별히 대림절기를 지내면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지를 시므온의 기다림의 모습을 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우리의 위로가 되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25절에 보면 시므온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시대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면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야가
바벨론을 점령한 후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던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이
이스라엘은 페르시야의 속국으로 강대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페르시야를 점령하게
되고 유대지역은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커다란 소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를 대항해서 항쟁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제사장의 후예들인데 로마의 권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스라엘을 안정케 하고,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사막으로 가서 고행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시므온은 이스라엘에 위로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함을 깨닫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시므온, 자신이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 메시야를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애통함을
품고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시고, 그 위로함을 네가 죽기 전에 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것을 성령으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땅 가운데 위로 받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전쟁과 테러들로 인해서 받는 아픔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도 캘리포니아에서
테러리스트의 총격으로 인해서 14명의 사망자가 생겼고, 이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비극적인 일들이 많이
나타나고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생활이 어려워지고, 잘
지내는 것 같은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건강의 문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 누구의 위로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름대로 위로를 삶으려고 합니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물질이 있으면 위로를 받고 그것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때로는 외로움을 위로 받기
위해서 이성을 찾기도 합니다. 이제는 이성만 찾는 것이 아니라 동성이라도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성이 같건 다르건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를 찾아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럴 때에 진정으로 우리가 구해야 할 분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로 받아야 할 상황을 상관하시고 간섭하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위로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경험할 때에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 예수님께서 나의 위로자가 되신다는 것 자체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므온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주님께 기도하며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우리 가운데 있는 슬픔과 아픔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과 역사하심을 기다리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 위로받고 구원받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했었던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위로받고, 삶의
문제로부터 해결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의 기쁨을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제단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대하며 메시야를 기다렸던 시므온은, 성전에 나타난
아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위로자가 예수님임을 깨달았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서 찬송하기를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만민에게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에게도 위로와 구원이 필요했고, 지구 상에 거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 구원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누가 권력을 잡고, 다른 나라를 통치하고 하는
외적인 힘에 관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의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심으로 죄로부터 애통하는 모든 이들의 위로와 구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가 쉽습니다. 나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며 내 나라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민이 죄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상관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여러 이슬람 국가들이, 그리고
북한이 하나님과 대적한다고 해서 그들이 멸망 받을 존재로 경멸의 대상자가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며, 어떻게 면에서 보면 그들은 더욱 메시야의 위로와 구원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만의 위로자요 구원자가 아닙니다. 주변에 나를 힘들고
어렵게 하는 악한 이들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그들의 위로와 구원이 되기도 하십니다.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이 주의 위로와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므온은 더하여서 말합니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민족보다 더 큰 영광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유대인 중에서 나셨고, 자신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먼저 열방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택함받고 쓰임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것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영광입니다. 그분을 전파하고 만민들을 위로할 수 있는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시므온을 통하여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이신 메시야를 기다려야 할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의로움과 경건의 모습입니다.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25절에
시므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시므온은 그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의롭고 경건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시므온의 외적인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충실하게 지켰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경건하다는 것은 '신중한,
조심성이 많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곧
시므온이 마음의 신중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뜻을
신중하게 분별하고 그분의 뜻을 그의 삶을 통해 행하는 그런 타입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냐 하면, 자신이 기다리는 메시야를 만나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자, 구원자를 죽기 전에 뵈어야
하니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 경건함과 의로움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는 자, 그리고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는 자들은
그 삶에 있어서도, 내적 외적으로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독일의 루드비히 황제에 대해서 많은 기이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입니다.
루드비히(Ludwig)가 공작이었을 때에 바바리아(Bavaria)라는 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드비히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괴롭히는 포악한 사람이어서, 성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공작이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에 있는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오랜만에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쓰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모든 문장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대충
중요한 몇 단어를 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얼마 후에 있을 것인지를 제대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겨우
본 것은 “in three”였습니다. 그러니 삼일 후에 무서운
심판이 있을지, 아니면 삼개월 후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글씨를 본 공작은 마음이 다급해 졌습니다. 이제껏 죄를 많이 지었던 공작은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삼일
안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은 삼일 동안 아내와 부하들에게 잘 해주었습니다. 죽어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생각을 하며 삼일 째 되던 날 높은 탑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공작은 다시 생각했습니다. 삼일이 아니라 석 달이었구나. 석 달 동안 가족과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세 달이 지나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공작은
이제야 확신을 가졌습니다. 삼 년이었구나. 3년 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삼일, 삼 개월, 삼 년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공작의 소문이 전 독일에 퍼지게 되고, 후에 독일의 황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린 것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면, 성탄의 메시야, 아니 더 나아가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는 우리의 삶도 분명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메시야가 내 삶 속에 오셔서 만나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기다림의 시간은 의와 경건으로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시므온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위로를 기다렸던 것과 같이, 성도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시대임을 깨닫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대의 어려움을 볼수록 하나님의
구원을 더욱 간절히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위로 받으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절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물질로부터 위로를 받으려다 더 상심하고 상처받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 부모가, 이 사회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위로가 그들에게
필요함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와 구원을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늘 순종하며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메시야의 오심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위로받고, 위로를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위로, 만민을 향한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대림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샘터질문
0. 12월, 성탄절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 자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 주변의 누구로 부터 위로를 받곤 합니까?
2. 오늘날 이 땅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보면서 애통해야 할 일들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3.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에게, 성령님께서 시므온이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볼 것을 예언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로가 메시야를 통해서 올 것이다. 죄로부터 인한 슬픔, 고난, 죽음 속에서 구원해 주시고 위로하실 것이다.)
4. 구원자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위로함을 받은 적은 언제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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