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5/2023 -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8-10]
https://youtu.be/DB9XDMvXuZw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빚을 져 본적이 있으십니까? 오늘날 빚을 지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동차나 집을 구입할 때에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돈을 꿀 때는 좋았는데 이를 갚을 때에는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 꾼 돈을 제 때에 갚지 못해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하고, 파산까지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가족이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돈을 꾸어 준 사람도 제 때 받지 못하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웃으며 빚 주고 싸우며 빚 받는다.” 라는 말이 있을 지경입니다.
성경에서도 보증이라든가, 금전적인 거래에 대해서는 권하지 않습니다. 자칫 금전적인 일이, 서로의 관계나 신앙에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성도들은 좋은 의도로 보증을 서기도 하고, 돈을 꾸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 문제가 생기게 되면 돈도 잃고, 사람들도 잃고, 또 신앙도 잃는 불상사가 생기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기에 아무에게도 아무런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빚을 지지 말라고 하는 것에 예외 조항으로, 꼭 져야 할 빚 하나를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피차 사랑에 빚진 자가 되라” 고 했는데, 그 뜻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마치 사랑에 빚진 자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사랑의 빚을 지고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에 누군가가 도와 주면, 그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사랑을 빚지고 삽니다. 부모님은 내가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아무 대가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자식들은 부모님께 사랑에 빚진 사람이고, 자녀들이 이를 갚아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때로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기도 합니다. 노숙자들에게 누군가가 가서 음식과 옷을 주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도 합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사랑에 빚을 지고, 그리고 빚을 갚으며 살아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서 피차 사랑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것에는 손해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고,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받음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토록 사랑에 대해서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법이라고 하는 것은 엄격하고 무자비한 것처럼 느껴져서, 사랑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바울은 율법의 완성이 사랑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우리가 사랑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절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율법을 완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있는 몇 백개의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고 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지킴으로 그 율법을 완전케 하셨나요? 만약 그렇게 해서 율법을 완전하게 할 수 있다면, 바리새인들은 그 공로로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과 여러 조상들이 만든 규정들을 준수하는데 아주 엄격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조차도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담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을 온전히 하기 위해 힘쓴다고 칭찬하며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율법을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도 그 사랑에 기초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어떤 기독교 이단은 지옥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옥을 만들 수 있냐며 지옥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면서 불법을 부추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랑없이 율법만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는 열심이고, 이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형식이나 의무적으로 말씀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으로 율법을 지킨다고 해도 그 율법을 완전케 할 수 없다는게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을 사랑하셔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없이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안에서의 봉사와 섬김의 모습도 사랑없이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봉사는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함 없이 불평과 불만가운데 그 일들을 한다면, 그 봉사와 섬김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8절에서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고 할 때에, 현재 완료형 시제를 사용합니다. 곧 내가 남을 사랑함으로 주의 말씀을 행할 때에 그 율법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그 말씀대로 외적으로 행한다고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동기가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 순종의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행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큰 사랑을 빚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하신지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꼭 그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어합니다. 엄마, 아빠가 아이들이 어릴 때에 무수하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면 사랑의 증표를 만들어 함께 나눕니다. 커플링이나 커플룩을 만듭니다. 산에 있는 돌에다가 두 사람의 이름을 새기고 가운데다가 하트를 그려 넣습니다. 남산에 가보면 펜스에 수 많은 자물쇠가 잔뜩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커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자물쇠에 써 놓고 둘의 사랑이 헤어짐 없이 늘 함께 하기를 바라는 증표로 달아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증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의 채권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의 빚을 예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 갚으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방법은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에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진짜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교회는 그 어느 공동체보다 사랑이 풍성한 곳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은 성도가 성도임을 나타내는 정체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빚진 사랑을 잘 갚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사랑의 빚만 지고, 서로에게 그 사랑의 빚을 갚지 않는 사랑의 불량자는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3. 그러면, 어떻게 사랑의 빚진 것을 갚아나갈 수 있습니까?
바울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바울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나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 몸에 좋다는 음식이 있으면 너도 나도 그 음식을 경쟁적으로 사서 먹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픈 것에 대해 함께 아파하지만, 자신이 당한 아픔보다는 못합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의 가장 큰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을 나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나 자신으로 여길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아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이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마치 자신과 같이 여기며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13년에 샌디에고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4학년 학생 15명이 대머리를 하고서 학교에 등교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한 줄 아십니까? 학교에 반항할 일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반에 Travis Selinka 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트라비스가 뇌종양에 걸린 겁니다. 트라비스는 7주 동안 머리에 방사선 치료를 받았습니다. 치료 후에 트라비스가 학교를 가야하는데 방사선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 대머리가 된 것입니다. 트라비스가 학교에 대머리로 등교했을 때에, 반 친구들은 트라비스가 당황하는 모습을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그 반의 친구들 중에 15명의 친구가 이발소에 가서 자신들도 머리를 깎았던 것입니다.
누군가 그 아이들에게 머리를 깎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트라비스의 15명의 친구들은 트라비스의 힘듬을 알고 기꺼이 머리를 깍은 것입니다. 친구를 사랑하기에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머리를 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도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대머리를 하고 오신 것은 아니고, 그 반대로 가발을 쓰고 오셨습니다. 암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빠져 가발을 쓰시고 어색해 하는 교우를 보시고, 그 다음 주에 자신도 가발을 쓰고 오셨더라구요.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됩니다. 그래서 아픈 이를 진정으로 위로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상대방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됩니다. 상대방의 기쁨을 질투하며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악을 행하게 됩니다.
9절에 보면, 바울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를 말하면서, 사랑은 악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한다면 이러한 일들을 행하지 않습니다. 내가 배우자를 사랑한다면 그 외의 사람과 간음을 하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살인하겠습니까? 살인이 아니라 도리어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의 것을 도둑질 하거나 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돕고, 내가 가진 것까지도 주기 마련입니다.
사랑은 나를 상대방과 동일시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상대방을 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기에,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고, 율법을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상대방과 내가 같지 않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룰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여길 때에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며 말씀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케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단순히 말씀에 순종한다고 그 말씀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그 행함에 동기가 되고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 주장된다면 외식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3:14절에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랑이 더해질 때에 그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의 삶과 우리 교회에, 사랑의 사건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사랑함으로 특별한 이벤트를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하시는 일에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매일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시는 분들도, 어쩔 수 없이 한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가족을 사랑함으로 그 일을 할 때, 그 식사준비와 설거지가 완벽해 지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일을 할 때에 언제 완벽해 집니까? 내가 하나님과 교우들을 사랑함으로 청소를 하고, 부엌일을 하고, 봉사를 할 때 그 일이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여기며 이해하고 사랑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말씀을 잘 알고, 심지어 그 말씀을 실천한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 미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삶이, 사랑함으로 인해 더욱 완전케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랑을 더함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완전케 하는 성도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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