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3/2019 -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진 사랑 [에베소서 5:1-2]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누구라고 생각하실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인들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은 육신의 부모님의 자녀로 사랑을 받으면서 태어났고
양육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분보다 우리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시는 분이 부모님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들의 사랑의 표현이 달라서 때로는 부모님이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오해와 상처를 가지신 분들도 계시지만, 일반적으로 자녀들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누구의 사랑보다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 육신의 부모보다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며 돌보아 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에게 육신의 부모만 있는줄 압니다. 그 육신의 부모가 나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한 분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나를 이 땅에 있게 하신 분, 심지어
나의 부모까지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호칭은 어린아이가 아빠를, 거리감을 두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친밀하게 부르는 호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실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육신의 부모가 우리를 있게 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빠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부모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아빠의 심정으로 사랑하시며 보살펴 주셔서 지금까지 있게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고, 하나님과 친밀한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셔서 사랑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행하며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은,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할 때에, ‘본 받는 자’는 원어로 ‘미메테스(Mimetes)’라고
해서 모방하는 사람, a imitator 을 말합니다. 어린 자녀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거치는 과정이 모방입니다. 어떤 대상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어느 주일에 우리 교회 초등학교 여자아이가 교회에 왔는데, 입술 주위가 벌겋게 되었더라구요. “아이 입술 주위가 왜 저렇게
벌겋냐?”고 물으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아이가 루즈를
입술에 칠했는데, 알러지가 있는지 벌겋게 되었다.” 고 합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어른을 흉내내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엄마 따라
화장도 몰래 해 보고, 아빠 넥타이도 한번 매 보면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본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엄마, 아빠를 본 받습니다. 좋은 것도 본받지만, 싫어하는 부분도 닮습니다. 친구를 닮습니다.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캐릭터 들의 말과 행동을 흉내내며
닮습니다. 제 친구중에서는 아버지 술심부름으로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 사가지고 오면서, 아버지처럼 술을 홀짝 홀짝 마시다가 술을 배운 친구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모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세상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합니다. 하나님을 본
받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선하게 여기고, 기뻐하고 온전하게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본 받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는 세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받는 자인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본받아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가운데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본 받아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행한 분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 사랑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서로 사랑할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사랑의
모범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2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 것과 다른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적으로 자신을 버리는 사랑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위해서 헌신하라’고 요구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강한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다가도,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또한 자신에게 손해를 준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자신을 정당화시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도, 자신의
옷을 벗기고 침을 뱉으며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른 사람은 용서해도 저 사람들은 용서못해!”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받는 이들을 향해서 ‘내가 당한대로 갚아 줄거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고 학대하고, 죽이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자신까지 버리셨고, 끝내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셨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인, 저와 여러분이 행해야 할
사랑입니다. 3.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버리는 사랑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기뻐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2: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곧 우리의 몸으로 행하는 일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물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제물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생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죽어서 바쳐지는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향기로운 제사로 기뻐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신 것도, 자기 자신을 버리신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죽여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그 삶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삶은,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내 자신을 버렸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재현하며 살았는지를
보시고 받으시는 분입니다. 1912년 4월에, 타이타닉호는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출향해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첫
항해 중에 빙산과 충돌합니다. 그리고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는데 그 배에는 승선한 사람들을 구조할 만한
구조선이나 구명조끼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 배에 승선한 대략
2,224명의 승객 중에서, 3분의 2가 넘는
1,500명 이상이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 때 그
배에 탄 선박회사 사장인 브루스 이스메이(Bruce Ismay)는 죽어가는 수많은 선객을 버려두고 구명보트에
올랐고 목숨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일생을 세상과 여론의 비난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며 다른 사람을 살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존 스미스 선장은 끝까지 구명보트 승선을 거부하고 승객들을 구조하다가 죽었습니다. 뉴욕의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 주인 스트라우스 부부는 남편이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부인도 승선을 거부하고
자기 하인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 주고 구명보트에 태운 다음 부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기도하며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월레스 하틀리라는 사람이 지휘를 맡은 연주대 8명은,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10분전 까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찬송가를 연주하며 끝까지 승객들을 위로하며 마지막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 희생의 사랑을 향기롭고 아름다운 제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얼마나 내 자신을 버리고 있습니까? 가정안에서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얼마나 버리고 삽니까? 교회안에서
나를 버리지 못해서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함으로 내 자신을 버릴 때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로 인해서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에 향기로운 사랑의 향기가 가득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친밀한 자녀로,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 받는 자녀의
삶을 살아갈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본받아 하나님을 드러낸 분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들을 행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 희생제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 자신을 사랑하여 행하는 이기적인 사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나 자신을 버리고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에 그것은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나 자신을 버리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시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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